* 답례제가 사실은 수많은 루프 끝에 도달한 엔딩이라면? 라는 상상으로 시작된 글 입니다. 답례제 내 대사를 다수 사용했습니다.
* 오탈자나 비문은 발견할 때마다 수정합니다.
* 아래는 작업하면서 들은 곡 중 하나 입니다.
https://youtu.be/3HUw6cB4hx4?si=gb5vJ1nLVDl7hISj
* 후기는 이쪽 익명함 혹은 트위터로 부탁드려요!
https://spin-spin.com/pause_sign
별님이 되는 기다! 그렇게 다짐했다. 그때 보았던 스승님의 표정이 어땠더라. 파란 장미에 파묻힌 채, 눈물이 맺혀 반짝이는 보라색의 눈동자가 왜인지 모르게 후련해 보였다. 카게히라는 있는 힘껏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내가 사는 의미! 살아가는 가치다……!
백야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새 소리가 아침을 알리고 있었다. 얇은 커튼 너머로 흘러들어오는 햇볕은 따스한데, 반대로 슈의 기분은 저조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잠깐 가만히 앉았다. 이윽고 그는 손을 뻗어 옆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휴대폰의 화면을 밝힌다. 그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이 날이면, 마지막 라이브 무대 이후다. 더 뒤로 돌아간 건 아니군. 그렇다면, 그날, 죽이라고 말한 도박이 어느 정도는 성공적이었다는 뜻이겠지. 슈는 짜증스럽게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그나마 세이브 포인트가 앞으로 당겨져서 다행이었다.
저는 어느 순간들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보통은 잠이 덜 깼느냐는 둥 헛소리로 치부할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슈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루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랬다간 병원에 입원당하게 될지 모르니. 하도 루프가 잦아지니, 이젠 슈도 루프를 처음으로 시작한 정확한 시점은 잊어버렸다. 기억을 더듬어본다면, 아마도 올해 가을 이후였을 것이다.
루프의 시점은 매번 달랐다.
어느 갈림길에서 선택하고 나면 다음 날 아침, 그 선택에 따른 결과를 알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최근 쇼콜라 페스에서 가든 테라스의 예약이 가득 찬 탓에, 허탕 치고 돌아와 하루를 마치고 일어났더니 하루를 되돌아갔다. 그러니까, 교무실에서 유급 이야기를 또 들었다는 말이다.
그 외에도 권유받았던 박물관 라이브를 거절했더니 당일 아침으로 돌아간 적도 있었다. 그리고 오후에 또다시 그들은 Valkyrie 라이브가 보고 싶다며 참석을 권유해왔다. 대체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슈는 가만히 팔짱을 낀 채 바로 직전 회차를 복기했다. 되돌아온 날짜로 따지면, 며칠 후는 답례제 날이다. Valkyrie의 마지막 무대가 끝난 후, 명령에 카게히라는 드물게 응.이라고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슈는 답례제 날, 카게히라가 분명 나타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지만 그날, 카게히라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설마, 정말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든가.
슈는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명령에 따르기만 하는 인형 따위는 필요 없다고 분명히 말했거늘. 슈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아니, 아닐 거다. 아무래도 Valkyrie가 답례제 무대에 오른다는 사실을 몰랐겠지. 그렇다면, 어떻게든 시간에 맞춰서 무대에 도착하게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슈는 피곤함에 절은 눈을 움직여 굳게 닫힌 방문을 바라보았다. 평소대로면 옆방의 카게히라가 부산스레 움직이는 소리로 시끄러웠을 테지만 최소 답례제 당일까지는 조용한 아침이 계속될 것이다. 이름을 기억 속에서 지우겠다고 말해놓고, 연락을 남기는 멋없는 짓 따위는 할 수 없다. 슈는 허탈하게 웃었다. 퍽 잊겠구나.
슈는 가만히 사라진 과거의 오늘을 떠올렸다. 오늘은, 그래. 나루카미가 오는 날이었던가. 슈는 눈을 질끈 감았다. 또다시 지저분한 바닥에 누워야겠군. 슈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다. 물론 그게 가장 효과가 좋았던 것도 사실이다. 슈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차라리 나루카미를 포섭할까.”
나루카미라면 카게히라를 위해서라고 한다면 아군이 되어줄 가능성이 컸다. 아, 정말이지. 피곤하네. 그는 다시 침대 위로 털썩 누웠다. 새하얀 천장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슈는 게임이라고는 관심 한 톨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가 아는 게임에 대한 지식이라고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들었던 것뿐이었다. 그런 슈도, 루프를 계속하다 보니 모르고 싶어도 알게 되는 것들이 여럿 있었다. 그중 하나는 이 거대한 루프의 주축이다.
시간을 돌아 여러 선택지를 고르고 그 선택의 결과를 겪는 건 분명 슈였다. 그렇지만, 루프의 주축은 슈가 아니었다. 예전에는 그저 긴가민가하기만 했던 추측이 이번 답례제 즈음의 루프들을 통해 거의 확실해졌다. 이 루프는 아무래도 카게히라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어느 순간부터 카게히라를 인형으로 볼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 계기인지, 아무래도 이 루프는 슈의 바람대로 카게히라를 인형이 아닌 인간으로서 살았으면 하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내가 이런 무한 루프 지옥에 빠지는 걸 원한 건 아니었는데.”
또다시 크게 한숨을 내쉰 슈는 몸을 다시 일으켰다. 머릿속이 복잡한 것과 하루를 잘 보내야 하는 건 별개다. 비록 이것이 이미 어제 한번 겪은 일 일지라도. 씻기 위해 책상 옆을 지나치려던 그는 저절로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걸음은 책상 위에 가만히 앉아 미소 짓고 있는 마드모아젤에게로 향했다. 아아, 사랑스러운 마드모아젤. 내게 정답을 알려줘.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분명 한탄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것인데도, 그녀는 그저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이번 3월 한 달만 하더라도 벌써 몇 번의 루프를 겪었다. 지하 라이브 하우스에서의 마지막 무대 의상을 제작해내지 못한 탓에 무대를 취소한 일부터 시작이었다. 무대를 취소하지 말았어야 했나? 그래서 다음 루프 때는 무대를 취소하지 않았다. 새로운 의상이 없었기에, 유닛 의상으로 무대를 진행했다. 대신, 카게히라가 무대를 주도하도록 맡겼다. 그가 인간으로서 자립해주기를 바랐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 또한 옳은 선택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솔직히 슈는 마지막 무대 라이브를 하도 많이 해서 제발 더는 그때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하고 내심 바라고 있었다. 라이브가 끝난 후 카게히라를 몰아붙여야 하는 그 과정이 상당히 피곤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자신을 죽이라고까지 말해야 했으니 말이다. 직전 루프 때 눈을 떴을 때부터 돌아가지 않았던 걸로 어렴풋이 예상하였지만, 오늘로 확실해졌다. 세이브 포인트가 옮겨졌다.
이번 변수는 답례제 당일, 카게히라가 나타나느냐 아니느냐다. 그는 가만히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었다. 이렇게 된 거, 나루카미를 설득한다. 뭐, 이게 정답이 아니라면 다시 또 돌아가겠지. 처음도 아니고, 이젠 이 루프에도 익숙해졌으니까. 슈는 쓰게 웃었다. 도박. 그렇게 불러야 마땅할 수준이지.
“그게 죄라면 나와 함께 지옥으로 떨어질 거냐?”
사실 슈는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저답지 않은 말을 했다고 느꼈다. 애초에 이츠키 슈라는 개인 명의로 아이돌 활동을 시작했던 지라 누군가와 미래를 꿈꾸게 될 거라고는. 그것이 심지어 다른 사람도 아닌 카게히라라는 점에서도. 이것이 정답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슈의 선택에 따른 결과는 전부 하루가 끝나야 알 수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는 깨달았다. 정답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그저 카게히라가 예술이라는 길을 같이 계속해서 걸어가 주었으면 했다. 평생 자신을 위해 잡다한 일만 해도 그는 기뻐할 테지. 그러니 카게히라로서는 큰 의미가 없기에 그저, 기쁘게 하려고 고집에 따라주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딱 한 보라도, 그가 발걸음을 내딛어주었으면 했다.
“응, 지옥 끝까지 함께 할 끼다.”
진중함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가벼운 말투였다. 하지만 슈는 오히려 카게히라의 그 모습에 편안함을 느꼈다. 며칠 전 두려워하던 모습을 보였던 것이 꿈이었다는 듯이. 눈을 둥글게 휘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 인간답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슈에게 지금은 중요한 갈림길 중 하나일 테지만, 그는 어깨에 힘을 풀었다. 너 때문에 애간장을 태웠다, 카게히라.
“지금이니까 고백한다만 고향으로 돌아가라며 널 내팽개친 후, 네가 분발할지 어떨지는 반반이라 생각했었다.”
작은 한숨과 함께 그날의 진실을 내뱉었다. 정말로, 일생일대의 대모험이라 불릴 만한 사건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실제로 루프를 끊기 위한 몇 번의 도전이 있었으니, 도박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러니 일방적인 이쪽의 고집이라면 고집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예술가의 자질을 알아차리고도 포기해버릴 순 없었다. 슈는 곧은 눈으로 카게히라를 직시했다. 카게히라는 긴장이 풀린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인생이란 건 알 수 없다, 스승님”
“정말이야. 그것이 유쾌하면서도 고민스러운 점이야 죽을 때까지 이런 게 계속된다고 생각하면 지긋지긋하군…….”
골치 아프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 그러했다. 인생이란 건 알 수가 없었다. 카게히라를 주축으로 끝도 알 수 없는 루프를 계속하게 될 줄도, 정말로 카게히라가 예술가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해준 것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스승님. 내, 진짜로 명령을 받고 나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고향에 돌아갔다…….”
카게히라의 고해성사에 슈는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했던 예상이 정말로 진행되었다는 걸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다. 슈는 꿀꺽 침과 함께 긴장을 삼켜냈다. 그래도 고향으로 돌아가진 않았겠지, 그저 무대가 있을 걸 몰랐던 거겠지, 하고 생각했던 과거가 몽글몽글 떠올랐다. 순간 슈의 머릿속에 의문점이 들어찼다. 그렇다면, 카게히라는 자신의 의지로 돌아오는 것을 선택했다는 뜻인데. 이건 나루카미를 포섭하고 말고의 수준이 아니었다. 그가 긴장한 걸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카게히라는 평소처럼 해맑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내, 해보고 싶은 일이 생겼다. 그랬더니 캄캄했던 눈앞이 단번에 열리고 정신을 차리니 한 손에 바늘을 잡고 바느질을 하고 있더라고…. 이미지가, 창작 욕구가 마구마구 생기더라고.”
이건 정말 순전히 카게히라가 선택했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카게히라는 정말로 슈가 바라던 정답을, 예술을 하는 걸 선택했다고 말해주었다.
“목적이, 꿈이 생겼으니까 내가 표현하고 싶은걸, 이 세상에서 탐구하고 싶은 걸 드디어 찾았으니께 그러니까 내도 스승님처럼 예술을 할 수 있는 예술가가 될 수 있다.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라믄 스승님하고도 함께 있을 수 있다.”
“……그 꿈이란, 네가 표현하고 싶은 건 뭐냐?”
이미 원하는 대답은 전부 들었다. 그런데도 그는 굳이 되물었다. 카게히라의 다짐을 믿지 못한다든가 등의 이유는 아니다. 예술가로서, 표현하고픈 것이 생겼다는 점에서 이미 카게히라는 인간이었다. 눈을 반짝이며 탐구하고 싶은 걸 찾았다고, 자기 입으로 예술가가 되겠다며 다짐하는 모습에 그는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깨달았다. 카게히라에게서 직접 듣고 싶었던 것은 이것이라고. 기나긴 루프가 오늘로 막을 내릴 것이라고.
카게히라의 다짐에 슈는 드물게 눈을 휘며 웃었다. 당연하겠지만, 카게히라는 아무것도 모른다. 오늘, 이날을 위해 슈가 같은 시간을 몇 번이나 겪어왔는지. 아니, 부족한 머리로 생각한 것치고는 제법 잘했어. 루프가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을지도 몰랐다. 인형이 아닌 인간으로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겠다고 다짐해주는 이 모습을 보기 위해서.
“자 카게히라, 언제까지 잡담할 생각이지? 더욱 귀하고 얻기 힘든 더없이 행복한 시간이 눈앞에 있는데!”
품 안의 푸른 장미가 불빛에 반짝였다. 푸른 장미라고 한다면 실제로 자연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색이다. 그렇기에 과거에 푸른 장미의 꽃말은 불가능이었다. 그런데 이후 과학의 발달로 인공 재배가 성공하면서부터 푸른 장미는 기적이라는 뜻으로 새로운 꽃말을 갖게 되었다. 그래,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인형이 인간이 되는, 이것이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으로서 미래를 약속해주는 지금이야말로 기적 그 자체였다.
그는 비어있는 손을 무대의 대중을 향해 뻗었다. 노래 부르자, 우리의 모든 것을! 슈는 고개를 돌렸다. 앞으로도 계속 무대 위에서 함께 해줄 파트너에게로.
지고한 예술을 선보이자! Valkyrie의, 너와 나의 앙상블을 울리자…….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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