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te Bow Tie Hearts Blinking Blue Pointer
종뱅 / 퀘이사
가비지타임

23.12.07.

고백 / 중력 → 《 Principia 》 → 특수 상대성 이론

*  《 Principia 》  특수 상대성 이론 이후

 

 

5월 5,6,7 한국 가. 시간 비워. 오전 07:00

 

시끄러운 알람이 기상 시간을 알렸다. 대학가 앞의 작은 평수의 원룸 안이 알람으로 가득했다. 충전기를 연결 해둔 채, 화면을 뒤집어 놓은 핸드폰에서 시끄러운 알람과 진동이 울렸다. 몸을 뒤집어 베개에 얼굴을 박은 병찬은 더듬거리며 머리맡의 핸드폰을 찾았다. 더듬거리는 손에 각진 핸드폰이 잡혔다. 핸드폰처럼 엎어진 채로 누워있던 병찬은 고개를 돌려 가늘게 눈을 떴다. 알람 7:30 AM. 익숙하게 검지를 화면에 가져다 대어, 알람 끄기 버튼을 눌렀다.

베개에 두어 번 머리를 비빈 병찬은 이내 덮고 있던 이불을 치우고 유령처럼 비척비척 일어났다. 대학 입학 겸 자취 2개월이 되어가는 병찬의 루틴은 거의 일정했다. 일어나서 양치질하면서 밀린 핸드폰 알림 확인하고 답장 보내기, 씻고 챙겨서 아침 운동 가기, 끝나고 수업 듣기.

평소처럼 눈 뜨자마자 밤새 쌓인 연락들을 하나하나 눈으로 훑었다. 그 가운데서 다짜고짜 시간을 비우라는 연락에 병찬은 곧바로 답장을 보내지 못하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밀어 넣고 마저 양치를 끝내고 씻기 시작했다.

오전 일곱 시면 거긴 몇 시랬지… 17시간 시차니까 대충…. 오후인가? 연습 전에 보낸 건가…. 아니 근데 무슨 이유도 안 알려주고 다짜고짜 시간을 비우래?

 

 

 

퀘이사

최종수 박병찬

 

 

 

박병찬에게 대학이 최종 목표는 아니었다. 왜 프로가 아니라 대학을 갔어요? 그 질문을 들은 병찬은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 농구를 해서 대학을 가고 싶었어. 라고.

농구가 좋은데, 농구가 하고 싶은데, 농구를 계속할 수 있을까? 어렸을 때부터 계속된 잦은 부상은 병찬의 마음에 풍랑을 일으켰다. 마음속 한구석에는 항상 그렇게 자문했다. 오히려 그래서였을 지도 모른다. 농구로, 경기로, 대학을 꼭 가고 싶었던 건. 좋아하는 걸 포기하지 않고, 무언가의 결실을 볼 수 있을 테니.

하지만 그 과정이 순탄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잦은 부상은 병찬의 단단한 심지조차 흔들리게 했다. 농구를 그만두어야 할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박병찬 자신보다도 박병찬이 농구를 그만둔다는 명제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병찬은 여전히 코트 위에 있다. 그리고 그걸 바라는 사람 중 가장 의외의 인물을 꼽으라면, 역시 단연 최종수였다. 턱을 괸 채, 신입생 필수교양을 수강 중이던 병찬의 머릿속에 오전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다짜고짜 시간 빼라는 건 무슨 예의니 종수야. 오전 07:50

너도 알겠지만 오전 07:50

이 형아는 바빠서 시간 못 뺀다 오전 07:51

하루라도 빼봐 오후 12:35

6일이나 5일로 오후 12:35

이거 웃기는 자식이네 오후 12:35

근데 거긴 몇 시냐? 오후 12:36

저녁 7시 오후 12:36

어쩐지 답장이 빠르더라 오후 12:36

 

열일곱 시간의 시차였다. 거기에 둘 다 각자의 일정이 있으니, 작정하고 서로 시간이 맞는 게 아니라면 대체로 대화가 한 번에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학생회관의 식당에서 칠천 원짜리 특별 학식을 먹고, 교내 카페에서 달콤한 라테를 들이켜던 병찬은 코웃음을 쳤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형? 같은 시간의 교양을 듣는 동기 겸 동생이 맞은 편에 앉아 물었다. 병찬은 핸드폰 화면을 뒤집어 두고 씩 웃었다. 있어, 좀 골 때리는 애.

핸드폰의 진동이 멎질 않았다. 겨우 5분이었다. 병찬이 핸드폰을 뒤집어 둔 게. 병찬은 미간을 찌푸리며 작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왜 이렇게 급해…? 중얼거리며 고민에 빠진 병찬을 바라보던 동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병찬은 한숨을 내쉬고 핸드폰 화면을 뒤집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화면 가득 보이스톡 알림이 울렸다.

“미안한데, 나 전화 좀 받고 올게.”

늦으면 먼저 가 있어. 미안! 병찬은 얇은 바람막이를 팔에 걸치고 핸드폰을 집어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을 깜빡거리던 동기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 반응을 확인한 병찬은 고맙다는 듯 눈인사를 건네며 다급하게 카페를 빠져나갔다.

 

 

“최종수 선수님. 이러시면 곤란한데요?”

카페 밖을 나온 병찬은 곧장 통화 연결 버튼을 눌렀다. 귓가에 핸드폰을 대며 볼멘소리를 내뱉는 병찬에게 종수는 묵묵부답이었다.

“이봐요, 최종수 선수님?”

“너 어차피 지금 점심시간이잖아.”

도리어 당당한 목소리에 병찬은 순간 열 받은 듯 비아냥거렸다. 아이고, 그러세요? 근데 전 바쁜데요?

“아씨…, 그러게 왜 연락 안 봐.”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셨잖아요.”

그때 말곤 시간 안 된다고. 부루퉁한 목소리에 병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종수야, 형아가 그렇게나 보고 싶었어? 건물 밖으로 나온 병찬은 비어있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고, 옆자리에 겉옷을 놓았다. 다리를 쭉 뻗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도 없었다.

“…할 말도 있고, 오랜만,이니까.”

“이야, 최종수가 웬일이야. 이게 외국물 효과인가?”

“씹…. 진짜 이럴래?”

결국 참다 참다 화가 났는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병찬은 킥킥 웃었다.

“아니, 근데 갑자기 일정 빼라니 이건 너무 매너가 없잖아.”

“하루 종일까진 됐고, 저녁만이라도 빼봐.”

할 말이 있다며 고집부리는 고집불통 최종수 때문에 병찬은 가만히 눈을 감고 그날의 일정을 떠올렸다. 사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6일 저녁 정도라면 충분히 일정 조정이 가능하긴 했다. 대강 마음속으로 일정을 조정한 병찬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할 사람 많겠네.

“그래그래. 6일 저녁에 봐.”

“6일 저녁 된다고?”

“그래. 이 형아가 아주 귀한 시간을 빼주는 거니까 고마워해라.”

“…”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반응에 병찬은 픽 웃었다. 박병찬도 나름 최종수라는 인간에 대해 학습했고, 대체로 반응하지 않는 경우는, 긍정적 의미였다. 시간을 확인한 병찬은 슬슬 전화를 끊어야 할 시간임을 확인했다. 병찬은 읏챠, 하는 소리를 내뱉으며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장난스러움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조심히 와라?”

“…”

또다시 묵묵부답이었지만 병찬은 겉옷을 집어 들며 말을 이었다. 슬슬 들어가 봐야 해. 나중에 또 연락하자? 어. 끊어. 그래그래, 잘 자. 병찬은 홀드 버튼을 눌렀다. 전화가 끊어졌다. 병찬은 핸드폰에 띄워진 날짜를 보며 다시 한번 점검했다. 최종수 귀국까지 D-21.

 

 

“얼씨구.”

약속 장소에서 가장 가까운 정류장에서 내린 병찬은 가게를 향해 걸어갔다. 사람이 많이 몰리는 대학가답게, 거리는 휘황찬란한 불빛들로 가득했고, 거리 한구석에서는 거리공연이 진행되고 있었다. 과잠 주머니에 양손을 넣은 채, 거리를 구경하던 병찬은 저 멀리 약속 장소로 정한 가게를 발견했다. 가게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일행과 수군거리며 누군가를 흘끗흘끗 바라보았다. 그 시선들을 따라간 병찬은 순간 헛웃음을 내뱉었다.

가게 입구에서 비켜서서 핸드폰을 보고 있는 장신의 남자는 어제까지도 병찬에게 잊지 말라며 신신당부하던 인물이었다. 후드티에 과잠을 입은 병찬과는 대조될 정도로, 단정하고 깔끔하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제대로 꾸민 차림이었다. 옷차림만 보면 고깃집이 아니라 어느 비싼 호텔 레스토랑에서 소개팅하는 사람 같았다.

챠콜색 블레이저 재킷에 검은색 슬랙스가 눈에 띄었다. 발목이 살짝 보이는 기장에 운동하는 사람이라 키도 비율도 좋아서 모델로 오해받을 만해 보였다. 본격적인 옷차림에 병찬은 질린 눈빛과 함께 느릿느릿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최소 열 명이 최종수를 흘끗 보고 지나갔다. 병찬은 최종수의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액정화면에 들이미는 짙은 그림자에 고개를 치켜든 종수는 바로 앞에 들이밀어지는 얼굴에 몸을 뒤로 뺐다.

“뭐야, 왜.”

“종수야, 너 어디 소개팅 갔다 왔니?”

“뭐?”

장난스러움이라고는 하나도 담기지 않은 진지한 물음에 종수는 미간을 살풋 찌푸렸다. 집에서 바로 왔는데.

“너 옷차림이 완전 소개팅 복장이야.”

“다들 이 정도는 입어.”

아니, 맞는 말이긴 한데…. 누가 소개팅도 아니고 고기 먹으러 오는데 그렇게 차려입고 오냐고…. 병찬은 좌우로 고개를 두어 번 젓더니 가게 문 손잡이를 잡고 당겼다. 됐다, 얼른 들어나 가자.

 

몇 분이세요? 문이 열리고 경쾌한 종소리가 입장을 알리자, 바쁘게 서빙하며 일하던 종업원이 다가왔다. 병찬은 주머니 속의 오른손을 꺼내 들어 검지와 중지를 들었다. 두 명이요. 따라오라며 종업원은 두 사람을 가게 안쪽으로 이끌었다. 사람이 많은 대학가이기도 하고, 시험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인지 두 사람 또래의 학생들로 바글바글했다. 널찍한 4인석 테이블로 안내받고, 종수는 자연스럽게 벽 쪽 의자로 들어가 앉았다. 병찬은 그의 건너편 의자를 끌어당겨 착석했다.

야, 뭐 먹을래? 너 먹고 싶은 대로 시켜. 자리에 앉은 종수는 입고 있던 블레이저 재킷을 벗어 옆자리에 가지런히 놓았다. 메뉴판을 펼쳐 종수 쪽으로 돌려준 병찬은 천천히 메뉴를 눈으로 훑었다. 2인분은 어림도 없을 것 같고, 3인분 세트로 시켜보고 부족하면 추가하자. 메뉴판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떼고, 살짝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하자, 종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병찬은 손을 들었다. 여기, 주문이요! 주문서를 들고 다가온 종업원에게 병찬은 메뉴판을 펼쳐 메뉴를 가리키며 주문했다.

“더 필요한 건 없으신가요?”

종업원의 의례적인 물음에 병찬은 고민하며 메뉴판을 뒤적였다. 맨 뒤 페이지의 음료들을 보더니 고개를 들어 종수를 불렀다.

“소주 마실래, 맥주 마실래?”

“너 마시고 싶은 걸로 해.”

“너는 호불호라는 게 없어?”

병찬은 툴툴거리며 메뉴판을 탁, 닫고 종업원에게 건넸다. 소주 한 병 추가해 주세요. 메뉴판을 받아 든 종업원은 메뉴가 표시된 주문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자리를 떴다. 병찬은 손을 들어 턱을 괴었다.

“그래도 고기엔 소주지.”

아, 근데 너 술 마실 수 있냐? 순간 깨달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병찬이 다급하게 물었다. 평소답지 않게 당황한 모습에 종수는 작게 웃었다. 어, 마실 수 있어.

 

컵 두 잔을 꺼낸 종수는 물을 따랐다. 물로 가득 찬 한 잔은 병찬의 앞으로 다가왔다. 눈으로 최종수의 행동을 주시하던 병찬은 검지로 탁탁 테이블을 두드렸다.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유명 아이돌의 노래에 맞춘 건지, 꽤 리드미컬했다. 병찬이 그러거나 말거나, 종수는 테이블 옆 서랍을 열어 가지런히 수저와 젓가락도 놓기 시작했다. 한 쌍은 병찬의 앞으로, 또 다른 한 쌍은 본인 앞으로 배치했다.

“언제 들어왔어? 오늘? 어제?”

“어제 이른 오후에.”

스몰토크의 운을 떼자, 기다렸다는 듯 화로의 불이 들어오고, 밑반찬을 포함한 메뉴들이 준비되었다. 종업원이 밑반찬을 놓아주는 동안에도 병찬은 계속해서 근황을 물었다.

“근데, 한국이야 연휴 주간이라지만, 너넨 아니지 않냐?”

“뭐, 휴가 같은 거야.”

맛있게 드세요. 고기가 놓인 접시를 둘 자리가 애매해서 들고 있는 모습을 본 종수는 손을 뻗어 접시와 집게, 가위를 같이 건네받았다. 할 일을 마친 종업원이 멀어지고, 종수는 달궈진 팬 위로 하나하나 고기를 올렸다. 고기가 올라가자마자, 팬은 기다렸다는 듯 기름이 튀는 맹렬한 소리를 내며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미국은 어때?”

“나쁘지 않아.”

팬 가득 열 맞춰 고기를 놓은 종수는 밑반찬 접시들을 슥슥 밀어 빈 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고기가 남아있는 접시를 그 빈 곳에 내려놓았다. 고기를 열 맞춰 배치하던 종수를 보던 병찬은 손을 뻗어 파채를 슥슥 비볐다.

“시즌은 아직이던가?”

“어.”

“그래?”

어색하기 짝이 없는 대화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파채를 비빈 병찬은 각자의 앞 접시에 적당량씩 배분했다. 과잠 주머니에 양손을 집어넣은 병찬은 몸을 뒤로 기대었다.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구워지는 고기를 멍하니 바라보던 병찬은 입을 달싹였다.

“프로 되니까 좋냐?”

“…좋다고 해야 할지, 어쩔지….”

집게를 집어 들어 고기를 뒤집던 종수는 평화로운 낯빛이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병찬은 물컵을 집어 들어 목을 축였다. 그냥, 아직은 잘 모르겠어.

“그런가….”

“…그러는 너는?”

“나?”

고개를 갸웃한 병찬은 묵묵히 고기를 자르는 종수에게 시선을 향했다. 어. 프로 안 가고 대학 갔잖아. 서걱서걱 적당히 익은 고기를 잘라 열을 맞추는 모습에 병찬은 작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들었는지, 불판을 향해있던 종수의 시선이 병찬을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병찬은 눈을 둥글게 휘며 웃었다.

“음~ 좋지?”

불만스러운 듯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모습에 병찬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농구로 대학에 가고 싶었는데, 그렇게 되어서 기뻤지.

“그리고, 경기를 전보다 더 많이 뛸 수 있게 되어서 좋지.”

“…”

정갈하게 잘린 고기들은 최종수라는 지휘자 아래 이리저리 움직이며 모든 면이 고르게 익어갔다. 노릇노릇한 색을 띠는 게 아주 맛있어 보였다. 먹으라는 듯 병찬 쪽으로 익힌 고기를 밀어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병찬은 젓가락을 들고 고기 한 점을 집었다. 첫 점은 그냥 먹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진 병찬은 단숨에 입 안으로 고기를 집어넣었다.

“이야, 최종수. 고기 잘 구웠는데?”

우물우물하며 병찬은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종수는 쌈 채소와 파절이를 넣어 쌈을 만들었다. 으이구, 싸가지 없는 자식. 여전하네. 병찬은 어깨를 으쓱이며 종수와 마찬가지로 쌈을 만들기 시작했다.

 

판을 새로 갈고, 나머지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병찬이 고기를 판 위에 올리기 시작했다. 빈 접시를 옆으로 내려둔 병찬은 저 멀리 놓인 녹색 병을 발견했다.

“아, 소주 시켜두고 잊어버렸네.”

소주와 함께 잔을 집어 든 병찬은 앞에 한 잔을 내려두고 다른 한 잔은 건너편 동행인에게 건넸다. 종수가 잔을 받아 들자. 병찬은 병뚜껑을 돌려 열었다.

“자, 받아라. 형아가 특별히 사는 저녁.”

“…생색내냐?”

“어, 생색낼 거야.”

종수가 들고 있는 빈 잔에 병 입구를 맞추었다. 천천히 병을 기울이자, 투명한 액체가 졸졸 흘러내렸다. 작은 잔이 금세 가득 찼다. 잔을 내려놓은 종수는 병찬에게서 병을 건네받았다. 병찬은 제 앞에 놓인 빈 잔을 들어 올렸다. 코를 스치는 아찔한 알코올 향에 병찬이 한쪽 눈을 찌푸렸다.

“자! 건배하자.”

내려둔 잔을 집어 든 종수는 병찬이 들고 있는 잔에 부딪혔다. 뭐라고 할 건데? 어, 그러게. 최종수 선수의 귀국을 축하하며? 뭐야, 그게. 촌스러워. 말이 많다, 종수야. 투닥거리는 사이 고기가 타는 듯한 소리가 두 사람의 다툼을 종식했다. 건배사는 따로 없이 다시 잔을 부딪친 두 사람은 잔에 입을 대고 주욱 들이켰다. 첫 잔은, 원샷이지. 병찬의 주장이었다. 꼰대 같아. 다 마시고 빈 잔을 내려놓은 최종수가 불퉁하게 내뱉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느릿하게 눈이 끔뻑였다. 급격하게 줄어드는 말수와 더불어 둔한 몸짓이었다. 녹색의 소주병을 집어 든 병찬은 자신의 잔에 남은 액체를 탈탈 털어 넣었다. 한 병 끝, 인데…. 녹색 병을 테이블 밑으로 내려놓은 병찬은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병찬의 시선이 최종수의 유려하게 뻗은 눈가에 닿았다. 테이블을 향한 시선은 느릿하게 끔뻑였다. 그 깜빡거림에 맞춰 병찬의 눈도 깜빡거렸다.

“종수야, 너 술 잘 못 하지.”

“…”

자작하는 취미는 없는데. 병찬의 혼잣말에 종수의 시선이 테이블을 떠나 병찬을 향했다. 눈이 마주친 병찬은 잔을 빙글 돌렸다. 소주만큼이나 투명한 잔은 병찬의 입가로 천천히 다가갔다. 병찬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 크으! 잔을 내려놓은 병찬은 톡 쏘는 알코올의 향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 행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종수의 입가가 작게 씰룩였다. 남은 고기를 입 안으로 밀어 넣던 병찬은 그 모습을 보고 툴툴거렸다. 웃기냐?

“아저씨 같아.”

“이게 취해서는 이제 아무 말이나 막 하네.”

“안 취했어.”

병찬은 쯧쯧 혀를 차면서 검지를 좌우로 왔다 갔다 했다. 취한 사람들이 꼭 안 취했다고 고집부리더라.

“안 취했으니까, 안 취했다고 하는 거야.”

“얼굴 빨간데, 아니라고 하기는.”

병찬의 놀리는 투의 말에 종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번쩍 떴다. 부리부리하게 뜬 눈이 흡사 맹금류의 눈빛처럼 날카로웠다. 아, 뭐야. 자기 안 취했다고 지금 저러는 거야? 병찬은 그 모습에 푸하하 크게 웃었다. 너무 웃은 탓에 눈물이 나왔는지, 손으로 눈가를 훔치며 웃었다. 종수는 묵묵히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물 흘리며 웃은 병찬은 테이블을 눈으로 슬쩍 훑었다. 종수야, 다 먹었지? 슬슬 일어나자.

드르륵,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와 함께 병찬이 몸을 일으켰다. 앉은 채로 고개만 들어 가만히 병찬을 바라보기만 하는 종수의 모습에 병찬은 고개를 갸웃했다. 손을 뻗어 종수의 눈앞으로 손을 두어 번 흔들었다. 최종수? 괜찮냐? 병찬의 물음에도 가만히 응시하던 종수는 이내 천천히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병찬은 난감한 듯 볼을 슬슬 긁었다. 얘, 괜찮은 건가.

 

계산을 마친 병찬은 문을 밀어 가게 바깥으로 나왔다. 가게 바깥에는 데자뷔처럼 길쭉한 인형이 가만히 서 있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 병찬은 피식 웃었다. 다가간 병찬은 팔꿈치로 종수를 툭 쳤다. 바닥을 향하고 있던 시선이 들어 올려 병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집에 가자. 병찬이 걸음을 떼자, 그에 맞춰 종수도 걸음을 떼었다. 원체 말수가 적은 최종수였지만, 취하고 나니 더 줄어들었다. 병찬의 질문에 종수는 입을 열기보다는 대체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젓는 식으로 대답했다.

지하철역을 향하는 길거리는 아까 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반짝이는 불빛들이 가득했고,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끼리 깔깔 웃는 소리가 두 사람의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우뚝 솟은 지하철역 입구가 두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언제 돌아가냐?”

“…내일, 저녁 비행기…!”

그 순간, 종수는 손을 뻗어 병찬을 잡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갑자기 당겨져서 놀란 듯, 눈이 동그랗게 커진 병찬은 종수의 상반신에 이마를 부딪쳤다. 야, 미친…! 무슨 짓이야?! 병찬이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옆에서 죄송하다는 사과 인사가 들려왔다. 병찬이 고개를 돌리자, 옆으로 커플로 추정되는 남녀 한 쌍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이며 지나갔다. 눈을 깜빡거린 병찬은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내려다보는 시선이 묵직했다. 병찬은 얼떨떨한 정신을 부여잡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 고맙다?”

병찬은 머쓱하게 말했다. 가만히 병찬을 바라보던 종수는 코웃음을 쳤다. 누구보고 취했다는 건지. 병찬은 어이없는 듯 혀를 찼다. 대화에 집중하느라 그런 거지. 이제 됐으니까, 손 좀 놔라. 형 아프다. 병찬의 말에 종수는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주머니에 넣은 손을 빼낸 병찬은 조심조심 인파를 뚫고 걸어 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종수는 그 자취를 따랐다.

 

두 사람의 걸음이 지하철역 개찰구 앞에서 멈추었다. 나는 이쪽인데, 너는? 난 반대쪽이야. 아 그래? 여기서 헤어져야겠네. 병찬은 교통카드를 찾는 듯 부산스럽게 주머니란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종수는 가만 서서 그 모습을 보다 입을 열었다.

“야, 박병찬.”

어? 부름에 병찬은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아랫입술을 작게 깨물던 종수의 입이 열렸다. 지하철 역사의 불빛을 등지고 서서 그런 건지, 술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지, 얼굴은 아직도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할 말 있다고 했잖아.”

“아, 맞다. 그랬지. 뭔데?”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 병찬이 가까이 다가갔다. 두 사람의 거리가 어느 정도 말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다. 종수는 주먹을 꽈악 쥔 채였다. 병찬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병찬의 움직임이 멎고, 종수는 무겁게 말을 토해냈다.

“…좋아해.”

“뭐?”

되묻는 병찬의 말에 크게 숨을 내뱉은 종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좋아한다고, 했어.

그 순간, 병찬은 얼굴만큼이나 벌겋게 달아오른 귓가를 발견했다. 이거, 취한 거 아니구나. 병찬은 황망한 시선으로 종수의 얼굴을 살폈다. 눈을 마주하지 않으려는 듯, 시선을 피하는 모습에 병찬은 입을 작게 벌렸다. 얘, 진심이구나.

역사에 지하철이 움직이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개찰구 너머에서 지하철을 내린 사람들이 다가왔다. 개찰구에 교통카드가 찍히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는 동안에도 두 사람 사이에선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저 멀리 지하철의 도착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적을 깬 건, 최종수의 한 마디였다.

“…이때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았어.”

“…”

분명, 아까 전까지 대화를 주도했던 것은 병찬이었는데, 둘의 상황이 뒤바뀌었다. 아무 말 없는 병찬과는 달리 내뱉고 나니 오히려 긴장이 풀린 종수는 병찬을 직시했다. 시선이 닿자, 시선을 피한 건 병찬이었다. 시선을 피하는 모습에 종수는 허탈하게 웃었다.

“됐어. 집에나 가자.”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낸 종수는 병찬을 지나쳐 개찰구에 카드를 인식했다. 가림막이 사라지고 종수는 개찰구를 넘어갔다. 심호흡을 한 병찬은 재빨리 몸을 돌려 개찰구에 카드를 인식하고 종수의 뒤를 쫓았다. 병찬과는 반대 방향 쪽 계단으로 향하는 모습에 병찬은 달려가 팔을 붙잡았다.

“내일, 내일 다시 이야기해.”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어떠한 감정도 없었다. 병찬은 붙잡지 않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저녁 비행기랬잖아. 가기 전에 잠깐 만나. 그때 다시 이야기해. 병찬의 진지한 눈빛에 종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병찬도 고개를 끄덕이고 잡았던 팔을 놓았다. 하도 강하게 쥔 탓인지, 재킷에 주름이 잡혔다. 개의치 않는 듯, 종수는 가만히 인사를 건넸다. 내일 봐. 입을 달싹이던 병찬은 굳은 표정을 풀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내일 봐.

 


*퀘이사 ; 활동은하핵을 갖는 매우 멀고 밝은 은하

 

유료분에 갑자기 나와서 당황한 오타쿠

(난 이거 중력 쓸때부터 콘티 다 짜놨는데... 심지어 그날도 이거 쓰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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