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20.
#종뱅_전력60분 클리셰
언젠가부터 우리의 작별 인사는 언제나 똑같았다. 잘 자. 여상스러운 인사말은 통화의 마지막을 알리곤 했다. 어김없이 들려오는 작별 인사에 보고 있던 인터넷 창을 내리고 통화 화면을 띄웠다. 최종수. 17:44. 박병찬은 고민없이 붉은색 버튼을 꾹 눌렀다. 검은색 통화 화면이 사라지고 홈 화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시선을 위로 올리자 기다렸다는 듯, 숫자가 바뀌었다. 11:19. 흡사, 시간을 재는 것만 같았다.
가만히 시간을 바라보자, 화면이 서서히 어두워지더니 화면에 무감한 표정의 남자가 떠올랐다. 천천히,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던 화면 속 남자는 휙 돌아갔다. 그는 쥐고 있던 휴대폰 화면을 뒤집어 침대 위로 내리눌렀다. 침대 위로 긴 팔다리를 주욱 뻗어 누운 채로 천장의 불빛을 직시했다. 통화 시간 앞자리가 1이었던 적은 처음이었던 것 같은데…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상념에 그는 비어 있는 손을 천장으로 뻗었다. 왼손 약지의 은색의 반지가 불빛에 반짝였다.
아마, 서로에게 애인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지, 1년 즈음이 됐을 때였던 것 같다. 종강 파티라 꽤 많이 술을 마셨다는 소리에 달려온 네가 불안하다며 끼워줬던 기억이 생생했다. 빼지 마. 불퉁하게 들리는 그 소리에 크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추위 때문인지 부끄러운 탓인지 뺨을 붉게 물들였던 네가 귀여워서. 사실대로 말했다간 화낼까 봐 술기운 올라왔다고 했었지만.
“생각해보면 한 시간 넘게 통화했었네.”
그 누구에게도 닿지 않을 혼잣말을 내뱉은 박병찬은 뻗은 팔을 접어 눈을 가렸다. 끊어진 통화 화면처럼 어두웠다. 언제부터였을까, 짧아진 통화 시간만큼 간절해지지 않았던 건. 의무감처럼, 습관처럼, 자기 전 통화가 권태롭다고 느껴진 것은. 영상통화가 아닌 목소리만으로 이뤄진 것은. 너와의 통화에 집중하지 못한 것은.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미국과의 시차 탓에 그들의 전화 시간은 항상 정해져 있었다. 오후 3시와 저녁 11시. 이는 미국에서 선수 생활하는 최종수도, 대학 생활을 맘껏 즐기는 박병찬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전 통화는 딱히 정해둔 건 아니었으나 총 2년 9개월의 연애 중 1년 3개월간의 롱디로, 일과의 한 부분이 되었다.
잘 자. 이번 작별 인사는 박병찬의 차례였다. 귀에 대고 있던 휴대폰을 내리자 통화가 종료된 화면이 띄워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인사말을 전한 쪽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15:21. 어제는 그래도 18분 가까이 통화했었는데… 줄어든 통화 시간이 박병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두 사람이 같이 찍은 사진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무언가 불만인 듯 입술을 삐죽인 얼굴에 쓰게 웃었다. 둘이 사진 찍은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더라? 휴대폰 앨범에 새로운 사진이 추가될수록 시간이 지난 사진들이 뒤로 밀려나듯 기억 또한 마찬가지였다.
휴대폰의 홀드 버튼을 누르고 암전된 휴대폰을 과잠 주머니에 밀어 넣은 박병찬은 느릿하게 강의실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친한 후배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애인이랑 통화는 잘하고 오셨어요?”
악동처럼 씨익 웃는 모습에 박병찬 또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자연스럽게 주머니 속 양손을 꺼내 꽃받침처럼 턱을 괴었다. 그러엄. 오늘도 애인의 숙면을 위해 내가 힘 좀 썼지. 눈을 휘며 웃는 모습에 후배는 작위적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진짜 애처가가 따로 없네요… 진짜 싫다…”
“어쩌겠냐, 어린애랑 사귀는 거니까 내가 힘내야지.”
누가 들으면 나이 차이가 엄청 많이 나는 줄 알겠네요. 익숙한 듯 질린 표정의 모습에 박병찬은 쓰게 웃었다. 고등학생 때 만나서 그런가… 뭐, 좀 애 같은 면이 있긴 해. 애 취급하면 싫어하는데. 박병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리고 교양과목 교수가 들어왔다. 후배는 재빠르게 박병찬의 옆자리에 앉아 주섬주섬 가방 속에서 책을 꺼냈다. 출석 부르겠습니다. 단상 위 교수의 목소리가 강의실을 울렸다. 정면을 바라보던 후배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박병찬에게 손짓해 귀엣말했다. 근데, 요즘 들어 일찍 들어오시네요?
“뭐?”
“아니, 전에는 교수님이랑 거의 비슷하게 들어오거나 이름 불리기 직전에나 들어왔잖아요?”
강의 늦을까 봐 애인분이랑 전화 통화 시간 줄인 거예요? 정말 궁금하다는 듯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에 박병찬은 순간 멍해진 표정으로 후배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랬어?”
“그랬잖아요. 전에는 대출을 해줘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에 꼭 와서 세이프 했었잖아요.”
“…”
박병찬. 강의실을 울리는 이름에도 박병찬은 멍해진 상태 그대로였다. 지레 놀란 후배가 박병찬의 눈앞으로 손을 휙휙 저었다. 박병찬 학생 안 왔습니까? 출석부에서 눈을 뗀 교수가 강의실을 훑자, 후배가 놀란 듯 박병찬의 손을 잡아 들어 올렸다. 들어 올린 손의 은색 반지가 강의실 불빛에 반짝였다.
“여기, 왔습니다.”
후배의 행태에 눈을 끔벅이던 박병찬은 이내 교수와 눈을 마주치고는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살풋 미간을 찌푸리던 교수는 대답을 잘하라고 나직하게 말하고는 계속해서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들었던 손을 내린 박병찬은 후배의 귀에 속삭였다. …내가 정말 그랬어? 계속해서 대답을 요구하는 그의 모습에 후배는 무표정으로 나직하게 내뱉었다. 네, 그러셨잖아요. 설마, 몰랐어요?
“전혀 몰랐어…”
그럼,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7강입니다. 강의를 시작하겠다는 교수의 목소리가 강의실을 가득 울렸다. 충격받은 표정의 박병찬을 본 후배는 인상을 찌푸리며 작게 속삭였다. 그거, 권태기 아니에요?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남은 강의를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겠다. 마른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탈탈 털고 물기로 젖은 수건을 세탁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흡사 골대에 농구공이 들어가듯, 수건은 손쉽게 바구니 안으로 들어갔다. 이 정도면 완벽한 3점짜리 슛이지. 멍하니 농구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금쯤이면 자고 있을 애인이 떠올랐다. 그대로 뒤로 누워 어정쩡하게 침대에 누운 박병찬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휴대폰의 화면을 켰다. 오늘의 굿나잇 전화까지는 아직 2시간이나 남은 시간이었다. 오늘은 몇 분이나 통화하려나.
사랑의 유효기간은 최대가 3년이라는 말이 있다. 대시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실제 경험이라고는 현재 최종수와의 근 3년이 되어가는 연애뿐이었다. 아마 1년 조금 넘었을 때 반지를 받았고, 그러고 나서 몇 개월 후에 종수가 미국으로 떠났고, 그게 대충 1년이 넘었을 것이다. 아직 3년까진 아니지만, 정확한 날짜는 긴가민가했다. 휴대폰 화면을 톡톡 두드리며 캘린더에서 날짜를 어렴풋이 세던 박병찬은 결국 휴대폰을 침대에 내리눌렀다.
“…디데이, 종수라면 알 텐데.”
천장의 눈부신 조명을 바라보던 박병찬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생각해보면 예민한 성정 탓인지, 최종수는 유난히 섬세한 편이었다. 애인 사이에 챙긴다는 기념일도 전부 최종수가 알게 모르게 챙겨왔었다. 아니, 박병찬 또한 연애 초기엔 분명 꾸준하게 챙겼었다. 이제는 사귀기로 한 날짜도 헷갈렸다. 겨울이었고, 21일 즈음이었고, 그 정도였다. 졸업식 이후였으니까… 정확한 날짜는 모르지만, 어렴풋이 30개월은 넘었다는 것 정도는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3년이면 36개월이니, 대충 2년 몇 개월째 최종수와의 연애를 지속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직 3년은 안 됐지만, 3년에 가까워진, 이제는 3년에서 아직 도달하지 못한 개월 수를 차감하는 게 둘의 연애 기간을 세는 것이 더 빠를 정도였다.
그거, 권태기 아니에요? 온종일 박병찬의 기분을 싱숭생숭하게 한 건, 역시 후배의 발언이었다. 다른 사람이 봐도 느껴지는 차이라면, 역시 달라진 게 맞겠지. 박병찬은 가만히 달라진 점을 찬찬히 되짚어보았다. 통화 시간, 연락 횟수, 만남 횟수, 는 아무래도 거리상 어쩔 수 없긴 하지만. 그래서, 박병찬은 최종수에게 서운한가? 대답은 아니오.였다. 그렇다면, 박병찬은 최종수가 지겨운가? 그것 또한 아니라고 생각했다. 박병찬은 본디 흥미로운 것에 꽂히면 그 흥미가 식을 때까지 붙드는 묘한 집요함이 있었다. 박병찬에게 최종수라는 사람에 대한 흥미가 식었나? 박병찬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이내 그것 또한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너무 익숙해졌고, 일상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이라 판단했다. 으으… 괴로운 듯 앓는 소리를 내뱉은 그는 머리맡에 놓여있던 까만 펭귄 인형을 껴안고는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아! 모르겠다! 머리를 비워야 해!
머리를 비우기 위해 보기 시작한 영화는 곧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려는 지, 주인공 일행들이 작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무언가를 외치려는 듯, 일행의 리더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갑자기 화면이 뚝 멈추고 휴대폰에서 맹렬하게 알람이 울렸다.
10시 59분, 자기 전 매일같이 하는 통화를 알리는 알람이었다. 박병찬은 보고 있던 스트리밍 앱을 내렸다. 초록색 수화기 버튼을 누르자 익숙한 화면이 떠올랐다. 즐겨찾기 창에는 딱 3개의 번호만이 저장되어 있었다. 부모님 두 분의 휴대전화, 그리고 최종수. 박병찬은 그 이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기가 오후 11시이니, 그쪽은 이제 오전 7시 즈음일 터였다. 보통 그는 알람을 정각에 맞추는 타입이니, 7시 알람이 울렸을 거고, 예민한 애새끼는 알람 소리를 듣자마자 끄고 일어났을 게 분명하다. 두 사람이 동거한 적은 없지만, 박병찬이 여태까지 보고, 듣고, 알아 온 최종수라면 분명 그럴 테다.
화면 상단 부분의 시계가 저녁 11시 1분을 가리키자, 박병찬의 손가락이 최종수의 이름을 꾹 눌렀다. 연결음은 길지 않았다. …응. 아직 잠기운이 가득 묻어나는 묵직하고 낮은 목소리에 박병찬은 작게 웃었다. 잘 잤어?
“오래간만에 영상통화 할래?”
“…이제 막 일어나서 몰골이 별론데.”
전환한다? 의사를 재차 확인하자, 작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알았다는 최종수 나름의 의사 표현이었다. 박병찬은 쓰게 웃었다. 이것 또한 우리의 3년 가까이 된 연애 동안 알게 된 것 중 하나겠지. 귀에서 휴대폰을 떨어뜨리고 영상통화로 화면을 전환하자, 기다렸다는 듯 화면 가득 잠기운이 가득한 잘난 얼굴로 가득 찼다. 왠지 부루퉁한 어린애 같은 표정에 박병찬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어휴, 자고 일어난 직후인데도 미남이시네요.
“…장난치지 마.”
질린 듯한 목소리에 찌푸려진 미간, 예상 그대로의 반응과 답변에 박병찬은 어깨만 으쓱였다. 자기 자신이 생각해도 볼멘소리였던 걸 느꼈는지, 두어 번 헛기침하던 최종수 뒤편으로 화면이 바뀌어 갔다. 휴대폰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박병찬은 뒤편으로 보이는 수건걸이에 시선이 닿았다.
“종수야, 아무리 형아가 좋다지만… 이른 아침부터 스트립쇼는 좀 과하잖아.”
연극배우처럼 천연덕스럽고, 과장되게 손으로 입을 막는 박병찬의 모습에 또다시 최종수의 미간에 골이 팼다. 거치대 위에 둔 것인지, 화면이 가만히 멈춘 채로 최종수의 얼굴을 송출했다. 헛소리 말라는 듯이 최종수는 칫솔에 치약을 부욱 짰다. 이내 양치질을 시작하면서 슬쩍 휴대폰 화면에 눈짓했다. 그 시선을 받은 박병찬은 눈을 깜빡였다. 흐음. 이젠 장난에 안 당해주네.
어깨를 살짝 으쓱이며 양치질하는 최종수의 모습에 박병찬은 손가락으로 톡톡 볼을 두드렸다. 음, 말을 못 하는 종수 대신에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으려나. 박병찬은 찬찬히 하루를 되돌아보며 할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러다가 문득, 후배와의 대화가 떠올라 톡톡 볼을 두드리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멈췄다. 사랑의 유효기간은 3년이라는 말도 있다는데, 거의 3년 정도 되셨댔으니까 권태기가 올 만도 하죠. 후배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묘하게 심각해 보이는 표정에 최종수의 눈이 날카롭게 그를 훑었다. 곧장 양칫물을 뱉고는 두어 번 물로 입을 헹구고선 추궁했다.
“뭐야, 무슨 일 있었어?”
“…어?”
생각하느라 한 박자 늦게 반응한 박병찬의 표정이 순간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였다. 입을 헹군 물을 뱉은 최종수는 살짝 시선을 휴대폰으로 주며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너, 표정이 좀 별로야. 예상치 못한 말에 박병찬은 고개를 갸웃했다. 종수야, 미국 가더니 독심술 배웠어? 아이씨, 장난치지 말라고. 세수하다가 화면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버럭 화를 냈다. 잘생기긴 잘생겼네… 문득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상념에 제동을 거는지, 째려보는 날카로운 눈빛에 박병찬은 항복했단 의미로 양손을 들어 올렸다. 알았어, 알았어.
“음, 뭐… 좀 신경 쓰이는 일은 있었는데… 별건 아니야.”
“그런 것 치곤 얼굴은 그렇지 않은데.”
“아… 뭐… 음… 종수야, 우리 오랜만에 영상통화니까, 좋은 이야기만 하자?”
눈을 휘며 웃는 박병찬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려는 듯 최종수의 눈이 천천히, 그리고 샅샅이 그의 얼굴을 훑었다. 무언가가 맘에 들지 않는지, 최종수의 미간은 여전히 골이 파인 체였다. …저녁으로는 뭐 먹었어? 동기들이랑 같이 학교 앞 김치찌개 맛집 갔지. 너 그 집 진짜 좋아하네. 언제 오면 형아가 특별히 데려가 주마. …참나.
과거의 자신을 저주한다. 멍한 눈빛으로 단상에서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가리키는 강사를 두고 박병찬은 크게 하품했다. 이거, 금요일 오후에 3시간이나 잡혀있는데, 출석만 잘하면 되는 패스 과목이에요. 동기의 말에 혹해서 신청한 교양과목은 에X리 타X에서 꿀 교양으로 유명한 과목이었다. 매주 금요일 오후에 특강을 듣고 감상문을 제출하면 되는 단순한 과목이었는데, 문제는 너무 지루했다. 보통 특강이면 좀 유명한 사람들 부르고 그러지 않냐? 첫날 특강을 들은 박병찬이 지친 표정으로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형, 그래도 패스 과목이잖아요… 우리 한 학기만 버텨봐요.
슬슬 마무리되어가려는지, 질문에 대해 답변하는 강사의 목소리에 박병찬은 목뒤를 주물렀다. 그리고 의자에 푹 파묻힌 채로 휴대폰 화면을 열고 99+라고 떠 있는 메신저 앱을 눌렀다. 질문 없으시면 마무리하겠습니다. 강사의 말이 끝나자 학생들은 우후죽순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지금 나가면 너무 복잡하니까, 어느 정도 빠져나가면 그때 나갈까. 그런 태평한 생각을 하던 박병찬에게 옆자리의 후배가 다급하게 그를 호출했다. 형, 형.
“왜? 뭔데?”
“이, 이것 좀 봐요.”
후배는 박병찬 얼굴 앞으로 휴대폰 화면을 불쑥 내밀었다. 너무 가까이 다가온 화면에 오히려 제대로 보이지 않아 박병찬은 후배의 손목을 잡고 천천히 뒤로 밀어냈다. 너무 가까워서 안 보이잖아. 뭔데? 후배의 휴대폰에 띄워진 건, 에X리 타X의 게시물이었다.
지금 정문에 키 크고 엄청나게 잘생긴 남학생 있던데 어디 과 누구인지 아시는 분?
제곧내
이게 뭐지? 박병찬의 눈이 게시물의 하단을 향했다. 댓글을 보던 박병찬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박병찬의 모습에 후배는 놀란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왜요?
“미안한데, 나 지금 당장 가봐야겠다. 주말 잘 보내라.”
익명 걔 우리 학교 학생 아님. 농구선수임. 최종수인가, 아마 그런 이름일걸.
1층이라 다행이다. 정문을 향해 뛰어가는 박병찬의 머릿속에는 아까 본 댓글이 계속 떠올랐다. 최종수? 걔가 왜? 걔는 지금 미국에 있는데? 잘못 본 거겠지. 머릿속에서는 강렬하게 부정하고 있었지만, 이상하리만큼 몸은 정문을 향해 숨을 헐떡이며 뛰어가고 있었다. 하필 정문에서 가장 먼 건물 일 게 뭐람? 정문을 향해 걸어가는 수많은 인파 사이를 이리저리 지나치자 저 멀리 푸른 나무들 사이로 거대한 정문의 구조물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낮이 긴 여름답게 이 정도 거리를 뛰었다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헉헉거리며 계속해서 걸음걸이를 멈추지 않고 뛰던 박병찬은 온전히 학교의 정문이 시야에 잡히자 속도를 낮추더니 이내 멈춰 섰다.
정문을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흡사 짠 것처럼, 어떤 한 사람을 계속해서 바라보고는 서로들 수군거렸다. 검은색의 휴대폰을 바라보는 그의 미간은 어제 보았던 그 모습과도 같았다. 박병찬은 눈을 의심했다. 그야, 지금 여기에 있을 사람이 아니니까. 분명, 아까 3시에 평소처럼 전화도 했었는데. 천천히 그를 향해 걸어가는 박병찬의 두 눈이 흔들렸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더욱 선명한 그 얼굴이, 모습이, 흡사 환상과도 같았다.
뭐가 그렇게 불쾌한 건지, 찌푸려진 미간이 눈에 잡혔다. 종수야, 그렇게 인상 쓰면 여기 주름 생긴다. 뭐래. 언젠가 그의 미간을 꾹꾹 누르며 했던 대화가 생각났다. 거리가 점차 가까워지자, 인기척을 느낀 건지 그의 시선이 박병찬에게 닿았다. 놀란 듯 동그랗게 눈을 뜬 박병찬의 모습에 최종수는 씩 웃었다. 오랜만이네, 박병찬.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에 박병찬은 최종수의 손목을 붙잡아 끌고 학교 밖으로 걸어갔다. 빠른 발걸음에도 불구하고 최종수는 그저 묵묵히 박병찬이 이끄는 대로 따랐다. 박병찬의 걸음이 향한 곳은 대학 근처의 그의 자취방이었다. 에브X 타X에 목격담이 떴으니, 카페같이 사람이 많은 곳은 무조건 피해야 했다. 공동 현관의 비밀번호를 빠르게 누르고 2계단씩 계단을 올랐다. 문의 잠금을 풀고 최종수를 집안으로 밀어 넣었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잠금이 걸리는 소리가 같이 울렸다. 어정쩡하게 서 있던 최종수는 갑자기 와락 안겨졌다. …언제 왔어? 아까. 3시에 통화했을 때는? 그때 즈음 비행기에서 내렸었어.
최종수의 허리를 껴안고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은 박병찬은 크게 숨을 내쉬고 뱉었다. 최종수 또한 그를 껴안고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은 채 살짝 머리를 비볐다. 짧은 머리카락이 박병찬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그렇게 서서 가만히 서로의 온기를 느끼던 두 사람은 서로 말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신발을 벗고 자취방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침대에 걸터앉아 물끄러미 서로를 바라보았다.
“시즌 중 아니야?”
“맞는데.”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반응에 오히려 답답한 쪽은 박병찬이었다. 그는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아니, 여기까진 어떻게… 왜 온 거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든 얼굴을 가만히 보던 최종수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너, 요즘 이상했잖아.
“내가?”
되묻는 말에 최종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말은 안 해주고.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만 말하고. 불쾌한 듯 찌푸려진 미간에 박병찬은 눈을 깜빡였다. 이내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더니 양손을 붙잡아 이리저리 손을 만지작거렸다. 왼손 약지의 은색 반지가 최종수의 시선에 닿았다. 말을 꺼내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물기를 두어 번 반복하다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이내 눈을 감고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너도나도, 서로… 좀 익숙해져서 그런가… 예전 같진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만지작거리던 양손을 강하게 붙잡은 박병찬은 고개를 번쩍 들어 최종수와 시선을 마주했다. 무언가 결심한 듯, 결의에 찬 눈빛이 최종수에게 닿았다. 통화 시간도 줄고, 연락 빈도도 줄었고, 네가 미국으로 간 이후로는 6개월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하기도 했고. 최종수는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듣다가 팔짱을 풀었다. 침대를 짚는 그의 왼손 약지에는 박병찬이 낀 반지와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최종수는 박병찬의 두 눈과 시선을 마주했다. 너만 그런 거 아니야. 나도 그랬어.
어느 순간부터, 박병찬이 좀 이상하다. 평소처럼 온종일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잘 자라는 인사말이 나오기 무섭게 전화가 끊긴다. 최종수는 통화 종료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분명, 예전에는 서로 전화를 끊으라고 말하느라 이것보다 더 길게 통화했던 것 같은데…
이상하다는 느낌은 계속되었다. 통화 시간이 줄어듦과 동시에 묘하게 피곤한 듯한 목소리나 얼굴에서 드러나는 부분들. 무슨 일 있냐는 물음에도 별일 없다고 웃는 그 모습까지도 전부 신경 쓰였다. 휴대폰의 잠금 버튼을 누르자, 화면 한구석에 D+1044라는 문구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마지막으로 박병찬을 만난 게 언제지? 작년 10월? 못 본 기간이 거의 1년 가까이 되었음을 깨닫자 최종수는 갑자기 멈칫거렸다. 그렇게 오래됐나?
“오래간만에 영상통화 할래?”
보통 영상통화는 자기 전에나 했지, 이른 아침부터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시차 탓에, 박병찬이 자야 할 시간은 최종수가 일어나는 시간이었고, 최종수가 자야 할 시간은 박병찬이 한창 학교에 있을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서로 자기 전에 통화하는 일과를 해야 했기에 최종수는 항상 오전 7시에, 박병찬은 항상 3시 수업은 절대 잡지 않았다.
몰골이 별로라는 볼멘소리에도 박병찬은 꿋꿋하게 영상통화로 전환했다. 홈웨어를 입은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 화면 가득 잡히자 최종수는 천천히 눈을 끔벅였다. 어렸을 때 비하면 많이 나아진 불면증이었지만, 깊은 잠이 들지 못하는 건 여전했기에 아침은 최종수에게 언제나 지옥이었다. 여상스러운 대화를 나누며 서서히 잠을 몰아내자, 씻기 위해 휴대폰을 든 채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칫솔을 물고 양치하기 시작하자 자신이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 탓인지, 박병찬은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별안간 그의 미간이 움푹 팼다. 보기 드문 광경에 최종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박병찬의 얼굴을 살폈다. 최종수는 곧장 양칫물을 뱉고 입안을 헹구고 그를 추궁했다.
“뭐야, 무슨 일 있었어?”
…어? 한 박자 늦게 반응한 박병찬의 표정이 순간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자, 최종수는 아까 전의 박병찬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신경 쓰이는 일이 있지만 별거 아니라고 했다. 곤란한 듯 웃는 그의 모습에 최종수는 결심했다. 아무래도, 박병찬을 만나야겠다.
오전 훈련을 마치자마자 감독과 코치를 통해 양해를 구해 이번 주 훈련을 전부 빠졌다. 무슨 일이냐는 질문에 일이 생겨서 잠시 한국에 다녀와야 한다고 하자, 곰곰이 생각하던 두 사람은 심각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불이익이 생기겠지만 최종수의 감으로는 지금이 아니라면 안될 거라는 어떠한 확신이 있었다.
곧바로 비행기 표를 알아보고 오후 1시 직항을 가까스로 구할 수 있었다. 최종수는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 탑승장으로 향하던 최종수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무계획인 모습에 허탈하게 웃었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이런 돌발적인 행동은 했을 리가 없을 것이었다. 아마, 이것 또한 박병찬을 만난 이후로 변한 부분 중 하나겠지. 승무원에게 탑승권을 확인받고 비행기에 탑승한 최종수는 좌석을 찾아 비행기 안쪽으로 들어갔다. 급하게 구한 탓에 일반석이었던 지라, 최종수의 키와 덩치에는 매우 비좁았다. 비행을 시작하려는 듯 들려오는 안내방송에 최종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눈을 뜨면, 박병찬을 만나게 되겠지. 그럼, 분명 무언가가 해결되겠지.
박병찬과의 메신저 기록에는 다행히 학기 초 박병찬이 보내둔 시간표가 있었다. 그러니까, 금요일은 오후 5시에 수업이 끝난다고 적혀 있었다. 가까스로 5시 전에 학교 정문에 도착했다. 가만히 서서 박병찬과의 메신저 화면을 켜고는 연락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아보았을 때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박병찬과 시선을 마주했다. 멍한 그 표정에 최종수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통화 시간도 시간이지만, 예전엔 전화도 금방 끊지 않았잖아.”
최종수는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할 말을 했다. 침대를 짚은 손이 시트를 꽈악 쥐었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도, 맨날 괜찮다고만 했잖아. 나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잖아.
“내가 너에게 의지가 되지 않는 건가, 그런 생각도 들었어.”
그의 묵직한 진심에 박병찬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고개를 푹 숙인 그는 중얼거렸다. 그런 건, 아니었어.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헤집으며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한숨을 푹 내쉰 그는 손을 뻗어 시트를 쥐고 있는 종수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무언가를 확인하듯, 손가락이 가만히 그의 손등을, 손가락을, 그리고 약지의 반지를 쓸었다. 시트를 쥐던 손이 서서히 풀리자 박병찬은 그 손에 가만히 손깍지를 끼었다.
“그냥, 너나 나나 둘 다 힘들고 바쁜데… 굳이 전화해서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그런 거 말하기는 좀 부끄럽지, 아무래도. 비어 있는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박병찬은 머쓱하게 웃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끼어드는 손가락에 최종수는 손을 꽉 붙잡았다. 역시나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애처롭게까지 느껴지는 그 악력에 박병찬은 미소 지은 채로 인상을 살짝 찌푸릴 뿐이었다. 왜 말을 못 해? 사귀는 사이에 그런 말도 못 해?
맘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린 최종수의 모습에 박병찬은 쓰게 웃으며 그의 미간을 꾹꾹 눌렀다. 이렇게 미간 찌푸리면 나중에 주름 생긴다? 너는 이런 때도 그런 말을… 말은 그래도 꾹꾹 눌러주자, 찌푸려져 있던 미간이 서서히 펴졌다. 미간에서 손을 떼어낸 그는 살짝 뻗친 듯한 머리카락을 슬슬 쓸어내렸다. 기분이 참 이상했다. 겨우 그것 때문에, 연습도 빠지고 네가 여기까지 와 있다는 게.
가만히 그 손길을 느끼던 최종수는 쓸어내리는 손을 붙잡아 제 얼굴을 쥐게 내리더니 그 손에 얼굴을 작게 비볐다. 말하고 고쳐나가면 되는 거잖아… 응, 그렇지. 너만 불안한 거 아니야. 나도 불안해. 그러니까, 전부 말해줘. 어린아이의 투정과도 같은 말에 박병찬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갈게. 기어코 공항까지 따라온 박병찬은 최종수가 출국장 너머로 사라져가기 전까지 함께했다. 도착하면, 연락해. 대충… 8시나 9시 즈음일 테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최종수의 모습에 박병찬은 씩 웃으며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갑자기 뭔데? 고마워, 너 봐서 좋았어. 눈을 휘며 웃는 그의 얼굴에 최종수 또한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웃었다.
출국장을 향해 가는 최종수를 향해 박병찬은 손을 흔들었다.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아지자, 그는 몸을 돌려 공항 바깥으로 향했다. 자정에 가까워지는 시간, 새까맣게 물든 밤하늘이 박병찬의 시야에 잡혔다. 비록, 다른 장소에, 다른 시간에 있지만, 같은 걸 좋아했을 때처럼, 우린 여전히 같은 생각을 하는구나. 그는 양손을 깍지 끼고는 하늘 높이 쭉 뻗었다. 방학 때는 내가 미국에 가보는 것도 괜찮겠지. 휴대폰의 잠금을 풀자, 다음 날로 바뀐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00시 00분. 후련한 기분이었다.
첨부한 노래는 "Nell - CLICHE" 라는 곡 입니다. 전력 주제 보자마자 생각난 곡이었고, 글 쓰면서도 계속 들었던 곡이에요.
후반부에는 "Nell - Wanderer" 라는 곡 들으면서 썼네요. :) 시간이 되신다면 두 곡 다 들어보시면 좋을거같아요.
사실.. 이 글을.. 정말 클리셰라는 주제랑 맞는지 고민을 했는데...
연애하다보면 권태기를 느끼거나.. 익숙해지거나 그런 도식화된 대사나 행동들이 전부 클리셰가 아닐까 싶어서.
어느 날 갑자기 내용이 일부 수정되거나 비문이 수정될 수 있습니다.. 퇴고를 아직 못했다는 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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