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9.25.
차의 움직임에 따라 밝은 햇빛이 유리창에 반사되어 반짝이며 산란했다. 어제 새차게 내린 비가 그친 다음날이라 그런지 가을 하늘처럼 맑은 하늘이었다. 후루야는 하늘과 비견될만큼 푸른 빛깔의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산란하는 빛에 그의 눈이 절로 감겼다. 차가 움직이며 빛의 범위에서 벗어나자, 찌푸린 인상을 폈다. 좌측 커브를 돌기 위해 잠시 정차한 사이, 후루야는 저 멀리서 케리어를 끌고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후루야만큼이나 밝은색의 금발이 걸음걸이에 맞춰 찰랑거렸다.
“열섬현상으로 더운 도쿄로 여행을 오다니 이해할 수 없어요.”
호오?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작은 감탄사에 후루야는 턱을 괸 채 바깥을 구경하던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카이 슈이치, 그는 이름에 걸맞는 붉은색의 스포츠카를 부드럽게 운전하고 있었다. 후루야의 시선이 계기판이 닿았고, 좌우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바늘이 가리키는 속도는 적정 속도 이내였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작은 움직임이었으나, 기민하게 그 변화를 잡아챈 그는 정면을 유지하며 눈동자만을 굴려 후루야 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여행객이 아닐 수도 있지 않나?
“케리어에 휴대폰을 보면서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잖아요. 게다가 이 근방엔 호텔들이 꽤나 밀집해있는 곳이기도 하고요.”
“그런가.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거겠지. 네 통찰력은 높게 사고 있으니.”
참나, 아카이 슈이치 주제에 날 인정하는듯한 그런 말은 사절입니다만. 대놓고 불쾌하다는 듯한 어투임에도 아카이는 어깨만 으쓱였다. 애초에 매도할 의도는 아니었는지, 후루야는 작게 웅얼거렸다.
“알고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도쿄의 여름은 상당히 더우니까요.”
후루야는 자세를 바꾸어 팔짱을 끼었다. 후루야의 말에 아카이는 작게 웃었다.
“본국도 열섬현상으로 상당히 더운 곳이었다만.”
아무래도 여긴 섬이라 그런지 더 더운 느낌이야. 눈앞의 신호등이 멈추라는 듯 붉은 신호를 띄우자, 아카이는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아 속도를 줄여 정지선에 맞춰 정차했다. 팔짱을 낀 채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댄 후루야는 피식 웃으며 눈을 감았다.
“뭐, 근데 당신은 더위를 그다지 타지 않아 보이긴 해요.”
“아아, 맞아. 더위를 아예 타지 않는 건 아니지만, 남들보다는 덜 타는 편이야.”
“정말이지, 도쿄에 최적화된 인간이네요. 짜증날 정도로.”
후루야의 볼멘소리에 아카이는 어깨를 으쓱일 따름이었다.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다보니 신호등에 초록불이 켜지고, 아카이는 엑셀러레이터 쪽으로 발을 옮겨 천천히 속도를 올렸다. 차가 움직이자 후루야는 다시 턱을 괸 채로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료한 표정의 후루야를 흘끗 보던 아카이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운전대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럼, 피서지로는 어디가 좋다고 보나?”
굳이 피서 목적이 아니더라도… 그래, 여행이라던가. 후루야는 씩 웃으며 아카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둥글게 휘어 즐거워 보이는 표정이 흡사 악동같았다.
“흐음, 딱히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요.”
저랑은 연이 없는 단어라서. 어깨를 으쓱이며 아카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근데 당신이 이렇게까지 말하니까 특별히 생각해볼게요.”
참고로 저 휴가 아직 많이 있어요. 키득거리는 후루야의 웃음소리에 아카이의 허탈한 듯 웃었다.
“이런, 슬쩍 물어볼 계획이었는데 이미 눈치 챘었나.”
“당연하죠. 당신이 굳이 내 선호를 물었다는 건, 무언가 계획하고 있다는 뜻이나 다름 없죠.”
후루야는 손을 펼쳐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었다. 크리스마스나 연말연시의 행사로 유명한 뉴욕의 타임 스퀘어나, 하얀 건물들과 푸른 바다색의 대비가 아름다운 그리스 산토리니라던가, 물의 도시로 유명한 베네치아가 있는 이탈리아도 괜찮겠군요. 근거리라면 훗카이도 삿포로의 라벤더 축제도 유명하니 여행지로 좋겠죠. 그래도 역시,
“유럽…이려나요.”
마지막으로 펼쳐져 있던 새끼손가락을 접었다. 가본 적은 없지만 대부분 영국에서 시작해서 유로스타를 타고 프랑스로 넘어가서 근처의 국가들을 여행한다고들 하더라고요. 휴대폰을 꺼내들어 화면을 톡톡 두드리던 후루야는 뭔가를 찾은 듯 화면을 아카이 쪽으로 향했다. 휴대폰 화면에는 영국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런던 아이가 찍혀 있는 야경사진이었다.
“런던 아이인가… 나쁘지 않지.”
웨스트민스터 쪽으로 가면 되겠어. 빅벤도 있고, 버킹엄 궁전도 있고 말이지. 익숙하게 좌측 신호를 넣고 커브를 돌자, 경시청 건물이 보였다. 후루야는 반쯤 파묻혀 있던 자세를 바로하고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옷차림을 점검했다. 그러다 이내 뭔가 생각난듯 고개를 획 돌려 아카이 쪽을 보았다.
“그러고보니 당신 영국 태생이랬죠.”
“뭐, 15살때까지는 영국에서 나고 자랐지.”
“15년 경력의 현지인 가이드라니, 그건 맘에 드네요.”
천천히 감속하며 경시청으로 향한 차는 게이트를 통과해 본관 건물 앞에 정차했다. 달칵하는 안전벨트를 푸는 소리와 함께 오른쪽 조수석 문이 열렸다. 씩 웃는 후루야의 얼굴에 핸들에 양 팔을 걸친 아카이 또한 시선을 마주하며 웃었다.
“네 맘에 들었다니 다행이야.”
“이봐요. 난 당신하고 여행 간다고는 안했어요. 설레발 금지.”
차에서 빠져나온 후루야는 이내 차체와 문을 붙잡고 상체를 숙여 안쪽을 바라보았다. 장난기로 가득한 미소였다.
“나랑 가주지 않겠어?”
“글쎄요. 당신이 오늘 하는거 보고 결정할까요?”
“그렇다면, 완벽한 에스코트를 해야겠군.”
문을 닫으려는 듯 상체를 세운 후루야는 하핫, 하며 작게 웃었다. 햇빛을 받은 후루야의 다갈빛의 피부는 그를 더욱 생기넘치게 만들었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금발은 경시청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두 빼앗았다. 후루야는 왼쪽 손목에 찬 시계를 톡톡 두드리며 웃었다.
“여섯 시, 데리러 오세요.”
사랑을 믿지 않는 후루야 레이가 유일하게 사랑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아카이 슈이치일 것이다. 후루야는 그 날 이후로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확신하지 못했다. ―내 애인은 이 나라야. 그가 사랑한 사람들이 사랑했던 이 나라였기에, 후루야도 이 나라를 사랑했다. 여태까지 후루야가 사랑했던 대상들과의 감정은 너무나도 달랐다. 그저 사랑에 가까운 감정이라 생각했기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날, 아카이 슈이치는 스스로가 품은 감정이 사랑이라 말했다. 보통 사랑이라 하면 에로스적인 사랑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후루야는 항상 스스로에게 자문했다. 나는 아카이 슈이치에게 성적인 끌림을 느끼나? 아니면 다른 유형의 사랑을 느끼나? 라고 자문하면 후루야는 여전히 스스로에게 확답을 내리지 못했다.
“아무로… 아, 이젠 후루야 씨죠.”
머리를 긁적이며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은 고등학생 명탐정의 얼굴에는 후루야도 잘 아는 익숙한 얼굴이 겹쳐보였다. 그 얼굴에 후루야는 픽 웃었다. 이렇게 보니, 정말 같은 사람이네.
“괜찮아. 그럴 수 있지.”
“공안은 어때요? 뭐, 공안의 일처리는 두 말하면 잔소리겠지만요.”
“문제 없어.”
신이치의 질문에 후루야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인 신이치는 잠시 입술을 달싹거렸다.
“ 공조 수사가 끝이 났으니 다른 분들은 본국으로 돌아가시겠죠…?”
미합중국 연방수사국을 비롯한 여타 수사국들과의 공조를 통한 조직의 궤멸이었다. 조직의 궤멸은 곧 버번의 끝, 잠입수사를 위한 아무로 토오루의 신분의 종료와 같았다. 눈치를 보는 듯한 그의 어투에 후루야는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미소 띈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턱을 괸 후루야의 자세는 무언가 불유쾌해 보였다.
“네가 그걸 모르고 있을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 확실하게 말해보지?”
“...내일 모레면 떠난다고 들었어요, 아카이 씨.”
그래, 나도 그렇게 보고 받았어. 턱을 괸 자세를 무너뜨리고 양 손을 잡아 무릎 위로 올린 자세를 취한 후루야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 때문에 이 이야기를 꺼낸 것 같지는 않고….”
“...후루야 씨는, 아카이 씨가 싫으신 건가요?”
신이치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후루야는 미소를 지워냈다. 흡사, 조직의 버번과도 같은 시선에 신이치는 순간 움찔거렸다. 신이치 군.
“그 이상은 월권이야.”
“...”
“그 남자를 완벽하게 용서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의 감형은 필요하다 생각하고 있어.”
“감형이라니….”
후루야는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더이상은 말해주지 않겠다는 후루야의 태도에 신이치는 한숨을 내쉬었다. 두 분 다 이 부분에서는 타협의 여지가 없으시네요.
“아카이한테 가서도 똑같은 말을 한 모양이지?”
“대답도 비슷했고요.”
그건, 좀 불쾌한데. 살짝 인상을 찌푸린 후루야는 됐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표정을 풀었다. 신이치는 후루야의 행동을 찬찬히 관찰했다.
“후루야 씨는, 아카이 씨가 밑으로 떨어지기를 바라세요?”
“뭐?”
“떨어지고 떨어져서, 정말로 재기조차 불가능한 수준이 되길 바라세요?”
진지한 신이치의 눈빛을 마주한 후루야 또한 굳은 표정을 지었다. 제가 보기엔 그건 아닌 거 같았어요. 후루야 씨는…,
“동등해지고 싶은게 아닌가요?”
“뭐?”
신이치는 추리할 때의 습관처럼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후루야 씨는 아카이 씨를 인정하지만, 그와 별개로 그 사람을 끌어내리고 싶은 건 아니잖아요. 신이치의 질문에 후루야는 계속 말해보라는 듯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꼬았다. 온 몸으로 불쾌함을 말하고 있었지만 고등학생 명탐정은 아랑곳않고 자신의 추리를 늘어놓았다. 오히려 후루야 씨가 그 사람을 따라잡거나 혹은 그보다 상위의 존재가 되고 싶은 거잖아요.
“그래. 난 그 남자를 인정해. 그를 밑으로 끌어내리고 싶은 건 아니야.”
“후루야 씨, 사랑과 질투의 차이가 뭔지 아세요?”
고개를 치켜들며 후루야와 시선을 마주한 신이치는 자세를 바로했다. 신이치의 질문에 후루야는 무언가를 생각하듯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계속 말해보라는 듯 턱짓하자 신이치는 망설임 하나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 ¹사랑의 본성은 항상 더 높은 곳을 동경한다. 상대를 동경함으로써 자신을 높이려 한다. 그러나 질투하는 사람은 자신보다 높은 곳을 목표로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더 높은 데 있는 상대의 발목을 잡아당겨 평준화하는 걸 목표로 한다. 질투로는 자신을 높이려는 동기가 나오지 않는다. 그것이 질투와 사랑의 차이다.”
“...굉장히 철학적인 접근이네.”
후루야는 양 손을 깍지 껴 탁자에 팔을 세우고, 그 위에 턱을 괴었다. 낮아진 시선 탓에 신이치를 올려다보는 후루야의 시선은 냉랭했다.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한 후루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견해 고마워.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서 헤어져야겠어.”
“후루야 씨!”
거침없이 현관문을 향하는 후루야에 신이치는 엉거주춤하게 일어나 헐레벌떡 후루야의 뒤를 좇았다. 구두를 신던 후루야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작은 감탄사를 내뱉더니 신이치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카이한테도 똑같이 물었겠지. 그는 뭐라고 했어?”
“...”
대답이 돌아올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듯 어깨를 으쓱인 후루야는 손잡이를 잡아 내렸다. 달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현관의 잠금이 풀렸다. 신이치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case closed!
“아카이 씨가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내일 저녁 7시 ‘셋이었던 시절의 그 곳’에서 보자고요.”
“...”
“후루야 씨, 저는 두 분의 일에 대해 잘 모르지만… 적어도 아카이 씨가 이 문제에 대해 끝을 맺으려고 결심하셨다는 것에 대해서는 알 수 있었어요.”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깐 채, 후루야는 묵묵부답이었다. 신이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내일 모레면 이제 이렇게 두 분이서 자리하기도 쉽지 않을 거에요. 그러니까…!”
크게 한숨을 내쉰 후루야는 손잡이를 쥐고 있지 않은 다른 손을 들어 설레설레 흔들었다. 흡사 백기를 흔드는 듯한 그의 태도에 신이치는 말을 멈췄다.
“그래그래, 알았어.”
신이치 군의 정성을 봐서라도 갈테니까 걱정 마. 손잡이를 쥐던 손을 밀어 현관문을 열었다. 석양이 지는 하늘은 그 남자의 이름처럼 타는 듯한 붉은 색이었다. 후루야는 붉은 색이 싫었다. 아마도 그건, 내일 회담이 끝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셋이었던 시절의 그 곳. 그건 다시 말해 조직에서 잠입하고 있을 시절, 팀이 되어 임무를 이행할 때 이용하던 세이프 하우스를 일컫는 말이었다.
“뻔뻔하게도 ‘셋’을 입에 담다니.”
후루야는 익숙하게 골목을 걸어나갔다. 사람을 숨기려면 군중 속에 숨기는 것이 제일이었다. 그래서 세이프 하우스는 도쿄 내에서 꽤나 번잡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로 인한 단점이라 한다면 차로는 이동이 불편하다는 정도였다. 후루야의 기억 속에 세이프 하우스는 번잡한 곳에서도 나름 골목 내에 위치해 있어 소음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오늘의 세이프 하우스의 방문객은 둘이었고, 후루야가 문 손잡이를 돌렸을 때 달칵하는 소리와 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렸다. 익숙하게 세이프 하우스에 들어간 후루야는 탁자 위에 놓인 위스키 병을 바라보았다. 그 셋 중 하나는 더이상 이 세이프 하우스에 올 수 없다.
“스카치로 주시죠.”
이 세이프 하우스에는 특이하게도 바 테이블 좌석이 있었다. 쇼파에 건장한 성인 남성 셋이 앉기엔 무리였기에 누구 한 명은 서 있거나 혹은 이 바 테이블 좌석에 앉고는 했다.
후루야는 바 테이블 좌석에 앉아 있는 아카이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카이는 후루야의 이동동선을 눈으로 따랐다. 그리고 별 말 없이 스카치의 마개를 열고 얼음이 담긴 잔에 부었다.
자신의 앞에 놓인 잔에서 시선을 떼고 옆자리의 방문객의 자리로 시선을 주었다. 후루야 쪽으로 잔을 밀어준 아카이는 자신의 잔을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하는 듯 했다.
“스카치는 자살이었죠.”
이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한 아카이의 태도에 후루야는 선수치듯 말을 내뱉었다. 후루야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술잔을 들던 아카이는 그 자세 그대로 멈춘 채 고개를 돌려 후루야를 바라보았다. 아카이 슈이치의 의도를 파악하기 힘든 무표정과 무감한 시선임에도 후루야는 아랑곳하지 않고, 작게 코웃음을 쳤다.
“이봐요. 내가 설마 그 정도도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죠.”
왜요? 이번에도 그 일은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등의 소리를 하려고 했나요? 온더락 잔을 들어 살짝 마시자 얼음들이 유리잔에 닿으며 청명한 소리를 냈다. 잔 표면의 물기가 똑 떨어져 탁자 위에 작은 물방울을 만들어냈다. 그 모든 광경을 눈으로 훑은 아카이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역시나 잔을 탁자 위로 내려놓은 후루야는 두 손을 깍지 껴 잡고, 그 위로 턱을 괴었다.
“녀석의 엄지 손가락과 손등에는 핏자국이 없었어요. 그것만 봐도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죠.”
목을 축이려는 듯, 다시 잔을 든 후루야는 잔을 좌우로 슬슬 흔들었다. 다시금 얼음과 유리잔이 맞부딪혔다.
“아카이 슈이치, 저는 당신을 많이 원망했습니다.”
당신 정도되는 남자가, 어째서 자결을 막지 못했나 싶어서 말이죠. 말을 마친 후루야는 잔에 든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 단숨에 들이키는 후루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카이는 카라멜 색의 버번 온더락을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타악! 테이블과 유리잔이 세게 맞부딪히는 소음에 사위가 고요해졌다. 그 가운데 후루야만이 아무렇지 않게 인상을 찌푸린 채 아카이 쪽을 노려보았다. 후루야의 강렬한 시선에도 아랑곳않은 아카이는 그저 잔을 찬찬히 내려놓을 뿐이었다. 후루야는 어금니를 꽈악 깨물며 동시에 입술을 짓씹었다.
“당신을 용서했냐고 묻는다면 그건 절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유라도 듣고 싶군요.”
어차피 다 끝나버린 일이니 전부 털어놔보시죠. 한숨과도 같은 숨을 내뱉은 후루야는 정말로 무언가를 포기한 듯 건조한 목소리였다. 후루야는 탁자 위의 위스키 병을 집어들고 비어있는 잔을 채웠다. 이제는 사라지고 없을 그의 코드네임과 같은 버번 위스키가 투명한 잔에 색을 채워넣었다.
“...자네는 그날 일을 어디까지 기억하지?”
탁자 위에서 자신의 잔을 만지작 거리던 아카이가 나직하게 물었다. 후루야는 잔을 집어들다말고 고개를 돌려 아카이 쪽을 보았다. 그는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피하듯, 혹은 드러내지 않겠다는 듯 눈을 감은 채였다.
“...저는 스카치, 경시청 공안부의 잠입 수사관이자 소꿉친구인 그에게서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기억을 떠올리려는 듯 후루야 또한 갈색의 술로 채워진 잔을 찬찬히 흔들었다. 메시지를 받자마자 그에게로 향했죠.
“너는 그날 계단을 뛰어올라왔었지.”
“그랬죠. 다급한 상황이었으니까요. 어떻게든 그를 살려야 했으니까요.”
아카이는 천천히 눈을 뜨며 후루야를 보았다. 후루야는 순간 멈칫거렸다. 눈빛이 변했다. 낙심? 죄책감? 아니면… 자괴감…?
“후루야 군, 리볼버에 대해 알고 있나?”
“단순한 지식을 묻는 겁니까?”
맥락을 읽을 수 없는 그의 질문에 후루야는 살풋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물음은 후루야를 비꼬기 위한 것도, 지식을 자랑하기 위함도 아니었다. 적어도 이런 쪽에서의 후루야의 감은 틀리지 않는다. 아카이는 만지작 거리던 술잔을 꽈악 쥐었다. 그렇다면, 자네에게 묻지. 리볼버의 실린더가 잡히면 어떻게 되지?
“...리볼버의 실린더 말입니까?”
후루야는 경찰학교 시절 사용했던 사쿠라라 불리던 리볼버를 떠올렸다. 실린더, 즉 탄창이 돌아가면서 격발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실린더가 잡히게 된다면,
“리볼버는 더블 액션이죠. 방아쇠를 당기는 동작에 해머의 두 가지 동작이 작동하죠. 해머의 락이 풀리면서 실린더가 돌아가고 해머가 공이를 강하게 쳐서 격발되니까…. 실린더가 돌아가지 못한다면…..”
방아쇠가…. 평소에는 자동권총을 이용하는 후루야였지만 사실상 자동권총이나 리볼버나 큰 차이는 없었기에 리볼버의 동작을 떠올리는게 어렵진 않았다. 후루야의 말은 점점 작아지더니 이어지지 않았다. 멍한 후루야의 표정에 아카이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방아쇠가 당겨지지 않겠지.”
“...”
“그리고, 난 그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후루야는 곧바로 아카이의 멱살을 잡아챘다. 예상하고 있었던 듯 평온하기 그지없는 그의 태도에 후루야는 순간 울분을 참지 못했다.
자그마치 몇 년이었다. 후루야 레이가 아카이 슈이치를 싫어하게 된 건. 근데 사실 그 분노는 허상이었다라는 말을 후루야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아카이 슈이치, 당신은 저를 동정합니까?”
분노로 가득찬 낮은 목소리는 흡사 태풍의 눈처럼 고요했다. 테이블 위에서 잔을 이리저리 흔들자 동그란 얼음들이 청량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아카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절대 아니야, 후루야 군.
“자네도 나와 마찬가지인 잠입수사관이라는 심증은 있었지만 확신할 순 없었어.”
“...”
“정황상 그렇게 처리하는게 맞다고 판단했을 뿐이야.”
후루야는 멱살을 잡아당겼다. 둘의 시선이 맞닿았다. 동요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녹안에 후루야는 거칠게 쥐던 멱살을 털어냈다. 아카이는 그저 옷을 툭툭 털었다. 후루야는 울분을 참지 못한 듯 계속해서 소리쳤다.
“동정이 아니라면 왜 여태까지 말하지 않았죠?”
“...네가 진실을 알게 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어.”
하! 후루야는 어이없다는듯 소리쳤다. 계속해서 저한테서 이유 모를 원망을 받더라도요? 분을 참지 못한 후루야는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성자 납셨군요.
“내가 그를 제대로 설득시키지 못했던 점도 분명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당신도 그런 생각은 하고 있었겠죠. 제가 오지 않았더라면, 스카치는 살았을 거라고.”
아카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우선은 진정해. 후루야 군. 아카이는 여전히 동요없는 표정이었다.
“그건, 불의의 사고였지. 누구의 탓도 아니라고 생각해.”
“그래요. 그럼 불의의 사고라는데 왜 내게 말하지 않았죠?”
“...네가 상처 받을 거라고 생각했어.”
아카이의 나직한 진심에 후루야는 순간 화내던 것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조용해진 사위 가운데 들리는 소음은 창문 너머로 들리는 번화가의 시끌벅적한 작은 소음들 뿐이었다. 아카이는 작게 한숨을 내뱉고는 고개를 돌려 후루야와 시선을 마주했다.
“누군가를 지키거나 아끼고 싶어하는 마음도 사랑이라면 난 사랑을 하고 있는 거겠지.”
아카이는 버번이 담긴 잔을 들어올려 불빛에 비추었다. 후루야는 순간 그의 눈빛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열망, 갈망, 욕망…. 후루야는 저도 모르게 심장 쪽으로 손을 대었다. 방금… 뭔가.
“자각하지 못한 새 시선이 자네를 향하는 것도, 자네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사랑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어.”
“...진부한 대사군요.”
떨떠름한 후루야의 말에 아카이는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편안해 보이는 그 표정에 후루야는 오히려 인상을 찌푸렸다. 후루야에게 사랑은 이렇게 가볍지 않다. 여태 후루야 레이가 사랑한 사람들은 비극적인 결말에 도달했다. 그랬기에 후루야는 함부로 정을 주지 않았다. 사랑은 그저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게 아니다. 후루야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강요할 생각은 아니었어. 그저, 어쩌다보니 스스로를 혼란케 하는 사건과도 같은 마음정리가 끝났을 뿐이지.”
후루야는 순간 신이치가 외쳤던 단어를 떠올렸다. 아카이가 후루야와 완전히 같은 대담을 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후루야는 그 단어가 뜻하는 바가 이거였음을 직감했다. 입을 꾹 다문 채 시선을 피하는 후루야에 아랑곳 않고 아카이는 말을 이었다.
“다음 달부터는 일본 지부에서 일하게 되었어.”
그런고로, 잘 부탁하지. 후루야 군. 아카이는 들고 있던 잔을 집어들고 후루야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후루야가 들고 있는 잔과 작게 부딪혔다. Cheers. 후루야는 아카이를 노려보았다. 뻔뻔하기 그지 없는 매끈한 얼굴에 스카치라도 뿌리고 싶을 심정이었다.
“...무슨 속셈이죠.”
아카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잔을 비웠다. 글쎄… 굳이 적합한 단어를 찾자면, 플러팅 인가.
¹ 미키 기요시 <불안의 철학>
둘을 여행 보내겠다는 일념으로 썼는데 여행보다 빌드업에만 한 달 쯤 걸려버린...
구분을 엔터 하나로만 하고 있는데 가독성이 어떨지 모르겠네요...
퇴고..좀 덜했는데... 간간히 수정합니다... (오탈자 슬쩍 알려주시면 감사합니다.)
SID - USO
BUMP OF CHICKEN - nanairo
swano hiroyuki - aLIEEz
MAAS, FUZI - circle of kar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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