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te Bow Tie Hearts Blinking Blue Pointer
중혁독자 / 기다림의 끝
전독시

중혁독자 / 기다림의 끝

전지적 독자 시점 / 트친한정 소장본 배포

 

 

 

  • 2019.04 제작 및 배포

 

 

 

 

Prologue ?

 

 

혼란한 세상, 황폐해진 세계, 그리고 구원자가 존재하지 않게 된 지상.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서서히 죽어갔다. 그 가운데서 한때 구원자라 명명된 남자는 망연히 멸망해가는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다려줘.”

나는 모든 걸 되돌릴 거야.

 

 

 

 

1

 

 

 

 

 

사이렌 소리가 센터 내부를 울렸다. 조용한 센터가 사이렌 소리로 시끄러워졌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적응되지 않았다. 소음과 동시에 한 인형은 문밖을 나섰다.

세상은 멸망 직전이었다. 백신이 만들어지지 않은 전염병의 확산과 급격한 기온 차 등의 이유로 점차 황폐해지어 사막과도 같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 극한 상황 속에서 이제는 지능을 갖지 않은 괴수들도 출몰하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무차별적으로 모든 것을 부수고, 사람을 해쳤다.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두려움에 떨었다. 그들은 세상이 멸망해 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을 구해줄 구원자를 바랐다. 그리고 그들의 바람에 응답하듯, 혼란한 세상을 구원할 특별한 인류가 나타났다. 그들은 평범한 일반인이었지만, 어느 한순간 특별한 능력이 개화되었다. 타인과는 차별화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그들을, 세상은 에스퍼라 불렀다.

에스퍼는 각자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특별함은 그들에게 경외심을 품게 했다. 그런 그들을 존경하는 만큼 두려워한 사람들은 그들을 관리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센터를 만들었다.

‘Esper Management Center.’ 에스퍼 관리 센터가 바로 그것이었다. 센터는 각 나라에 하나씩 지부를 두고 있었다. 한국의 관리센터는 서울 지부였는데, 요즘 그들은 빌런의 잦은 습격 탓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빌런은 에스퍼들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에스퍼들처럼 센터에 소속되지 않은 자들로, 센터의 행동에 반(反)했다. 비록 조직의 크기는 센터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작았지만 그들의 전력은 의외로 까다로웠다.

관리 센터는 오각형 모양의 벽으로 둘러 쌓여있다. 각각의 벽 안은 A부터 E까지, 총 5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그 구역에는 얼마 남지 않은 일반인 중에서 발현 가능성이 보이는 자들을 외부와 격리해둔 곳이었다. 아직 불완전한 곳인지라, 5개의 구역이 매번 열려 있지는 않았다. 제한적으로 한 구역만을 열어놓고 나머지는 닫아놓았다가 문제가 생겼을 시, 다른 곳으로 옮기곤 했다. 그리고 빌런이라 불리는 자들은 벽을 공격해 센터의 구역을 침범하고, 그곳의 시설들을 파괴했다.

빌런의 목적은 센터의 파멸이었다. 에스퍼 관리 센터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상층부는 모두 일반인이었다. 바깥에서 위험에 노출된 일반인들과는 다르게 그들에게는 자본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자본을 가진 그들은 에스퍼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기보단 도구로 휘두르곤 했다. 괴수의 습격이나 빌런의 침입 등 문제에 대한 실질적 처치는 에스퍼의 담당이었지만, 그에 따른 찬사는 상층부의 몫이었다. 에스퍼를 제대로 관리하고 있다는 웃긴 이유로 말이다. 빌런은 그러한 센터의 무자비한 에스퍼의 대우에 불만을 가진 자들이 모인 집단이었다.

 

 


 

 

 

서울 지부를 대표하는 에스퍼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10명 중 10명이 ‘유중혁’이라고 답할 것이다. 에스퍼 관리 센터가 설립된 계기이자, 서울 지부 내 가장 강력한 에스퍼이자, 유일무이하게 2개의 능력을 가진 자였다. 대중의 지지와 찬사를 받는 그는 상부에서도 예의 주시하곤 했다.

프로게이머로도 유명했던 그는 어느 날 홀연히 은퇴를 선언했다. 이유는 그저 휴식의 연장선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1년 후, 그는 대중의 앞에서 화려하게 에스퍼로 데뷔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23세였다. 그 이후 인터넷에서는 프로게이머 은퇴 이유가 능력의 개화 때문이 아니냐는 말이 떠돌았다.

대중이 아는 에스퍼 유중혁의 능력은 ‘공간 왜곡’이었다. 공간을 비틀어 괴수를 흡수해버리는 장면은 모두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그의 상징성과 인지도 때문에 유중혁은 어지간한 사건·사고에 꼭 얼굴을 비추었다. 당연하지만 자의가 아닌 지시로다.

사이렌 소리가 멎고, 기계음의 안내방송이 센터 내에 울려 퍼져감과 동시에 유중혁의 단말기 화면이 알림으로 불을 밝혔다. 유중혁은 묵묵히 화면의 잠금을 풀고 알림을 확인했다. 「C.」 익숙한 내용이다.

사실 연락이 오지 않아도 유중혁은 이미 C 구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연락은 그저 기록을 남기기 위함일 뿐이다.

유중혁은 이런 자신의 상황을 인지할 때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쾌감에 가까운 감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C 구역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잠재적 에스퍼라는 이름으로 정해진 구역에서 살아가던 일반인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잠재적 에스퍼라지만 말 그대로 능력이 개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화 전까지는 일반인과 별다르지 않았다. 유중혁의 시야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센터와 외부를 가르는 높은 벽이었다. 벽에는 큰 균열이 일어있었다. 아무래도 괴수의 무차별한 공격 탓인 듯했다. 그런데 균열 외에는 괴수가 들어올 만한 구멍이나 입구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역시나... 오늘도 한수영인가...”

빌런의 수는 정말 적었다. 정확하게는 그렇다고 추측할 뿐이다. 센터는 빌런의 정확한 전력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센터를 공격하는 자들은 항상 3명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 까다로운 상대는 단연 한수영이었다. 괴수를 조종하는 능력 탓이었다. 센터 밖에서는 에스퍼가 마저 처리하지 못한 괴수들은 그 능력에 조종당하곤 했다. 물론 여태 보아온 바로는, 조종에도 한계가 있었다. 대략 30분이 한계였다. 그렇기에 센터 기준으로 대략 1km 내에 존재하는 괴수들이나 그 안으로 들어오는 괴수들만 처치하면 됐다.

문제는 한수영의 능력이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다. 한수영의 또 다른 능력은 괴수를 소환하는 능력이었다. 이 능력 때문에 센터는 한수영의 침입만큼은 막고 싶어 했다. 한수영 한 명만 센터 구역 내로 들어오면, 그 구역을 황폐화하는 건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한수영의 침입을 막기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은 또 다른 빌런 때문이었다.

벽에는 입구가 있다.

너무 당연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사실 이 입구를 통과할 수 있는 자들은 매우 한정적이다. 에스퍼나 잠재적 에스퍼로 추정되는 자들뿐이다. 그래서 입구를 관리하는 건 잠재적 에스퍼였다. 애초에 센터 소속 에스퍼를 모르는 잠재적 에스퍼는 있을 리 없으니까.

대략 1년 전부터 센터에 잠재적 에스퍼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잠재적 에스퍼 영입 담당인 김독자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정확하게는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직 이 세상에 김독자는 존재하고 있다.

그저, 더는 동료가 아닐 뿐이었다.

 

 

 

 

 

까다로운 상대가 한수영이라면, 껄끄러운 상대는 김독자였다. 전 센터소속 에스퍼였던 김독자는 센터 사정에 훤했다. 거기다가 그의 능력인 사이코메트리 때문에 센터 측은 정보전에서 항상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벽을 담당하는 잠재적 에스퍼들에게 한수영을 센터 내부로 들이지 말라고 말해도, 김독자의 사이코메트리에 당하곤 했다. 물론 읽히기만 하는 능력이기에 위험하지는 않았다. 센터는 김독자를 마주할 시, 절대 능력에 당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하면 괜찮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잠재적 에스퍼는 자신을 안전한 센터 내부로 들여 보내준 김독자를 져버리지 못하곤 했다. 그는 해당 인물을 설득시켰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설득시키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남은 한 명, 정신계통 능력을 가진 안나 크로프트 탓이었다. 3명의 빌런이 안전하게 센터구역에 진입하고 나면, 안나 크로프트는 그의 기억을 말소시켰다. 그 때문에, 센터가 해당 잠재적 에스퍼를 추궁해도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유중혁은 자신을 바라보는 무수한 시선들을 의연하게 받아냈다. 시선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있었다. 환희, 감격, 경외, 두려움, 공포. 유중혁에게 이러한 시선들은 익숙했다. 세상은 멋대로 구원자 유중혁을 바랐고, 강제했다.

유중혁이 걸음을 떼자,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은 양옆으로 갈라서기 시작했다. 레드카펫인 양, 펼쳐진 길의 끝에는 거대한 괴수들이 여럿 있었다.

괴수의 머리에 앉아, 이 광경을 바라보는 한수영과 안나 크로프트, 그리고 센터를 둘러보는 그가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가는 흑발과 백색 코트의….

유중혁은 다양한 감정이 담긴 시선들을 지나치고, 이번 C 구역 사건 담당 에스퍼-로 추정되는-정희원과 유상아를 지나쳐 길의 끝에 도달했다.

유중혁의 발걸음이 멈췄다. 유중혁의 시선은 단 한 사람만을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그의 눈길이 유중혁을 향했다. 김독자의 얼굴에 죽어있던 생기가 들어찼다. 그는 생긋 웃으며 손을 들고 슬슬 흔들었다.

“중혁아, 안녕?”

 


 

 

 

나는 오늘도 너의 여전함에 안도한다. 너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다. 네가 나에게 품는 감정을, 내가 너에게 품는 감정을, 뭐라 정의 내려야 좋을까. 배신감? 불안감? 적어도 좋은 감정은 아니겠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느껴질 때마다 습관적으로 네가 떠오른다. 너의 환상이 실체가 된다. 그때의 나는 가장 연약한 사람이 된다.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이 더욱 선명해진다.

내 시야에는 오롯이 너만이 가득 찬다. 시선에 온도가 존재한다면, 너와 나의 시선은 양극단일 것이다. 맞부딪힌 시선에 너의 눈매가 유려하게 휜다. 딱딱하게 굳어만 있던 입매가 호선을 그린다. 그 표정은 내가 기억하는 에스퍼로서의 김독자일 때다. 오늘도 너는 내게 상기시킨다.

 

「내 세상을 너에게 줄게.」

 

내게 했던 마지막 언어를. 여전히 나는 기억한다.

 

 

 

 

2

 

 

 

 

김독자. 28세. 센터넘버 91. (전) 센터 소속 보조계 에스퍼. 사이코메트리.

 

김독자는 사실상 이 나라에서 첫 번째로 능력이 개화한 케이스였다. 물론, 비공식적으로. 공식적으로 한국의 첫 번째 에스퍼는 유중혁이었다. 센터가 세워지기 전의 괴수들과 전염병 등으로 혼란했던 한국에서, 처음으로 괴수를 해치웠던 에스퍼가 바로 유중혁이다. 유중혁의 뒤를 이어서 공식적으로 두 번째는 정희원이었다. 정희원도 유중혁과 비슷한 이유였다. 괴수를 죽이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각인되었기 때문이었다.

센터가 설립되고 특별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 센터에 하나둘씩 소속되었다. 그리고 에스퍼들의 능력 개화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그들에 대한 각자의 정보수집으로 알게 된 사실이었다. 김독자의 능력은 사이코메트리였다. 사람이나 사물에 접촉해 상대의 정보를 읽어내는 일종의 보조계 능력이었다. 그렇기에 김독자는 제 힘으로 괴수를 죽일 수 없었다. 김독자의 말에 의하면, 그의 능력 개화 시기는 유중혁보다 약 1년 정도 빨랐다고 했다.

유중혁과 정희원 외에도 여러 에스퍼가 등장해 센터가 설립되고 난 후, 김독자 또한 센터 소속 에스퍼가 되었다.

그는 스스로 센터의 문을 두들긴 유일한 에스퍼로 기록되었다.

 


 

 

 

김독자는 센터소속 에스퍼가 되었다. 그리고 김독자가 맡은 일은, ‘잠재적 에스퍼’를 판별해내는 일이었다. 김독자는 자신의 능력인 사이코메트리를 이용해 잠재적 에스퍼를 선별해냈다. 능력이 개화하는 계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김독자는 종종 이렇게 대답했다. ‘강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능력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라고.

센터는 보조계와 전투계로 2인 1조를 구성했다. 전투계인 유중혁과 보조계인 김독자는 한 팀이 되었다. 센터의 상징적 존재로 일컫는 유중혁이기에, 김독자도 유중혁과 같이 다니곤 했다.

그렇게 같이 다니면서 유중혁이 본 김독자라는 사람은 센터 내의 악동이었다. 휘적휘적 센터를 이리저리 휘젓고 다녔다. 출입금지구역의 비밀번호 패드에 능력을 사용해 비밀번호를 알아내 멋대로 출입한다던가, 비밀번호를 바꿔버린다던가. 종종 유중혁에게 능력을 사용해 생각을 읽기도 했다.

그런 한량 같은 김독자도, 업무에서는 눈빛이 달라졌다. 사실 김독자의 능력은 대(對) 정신계 능력에 특화되어있었다. 정신계통 능력에 당한 에스퍼에게 사이코메트리를 사용하고, 읽어내어, 거기에 맞는 간단한 카운슬링도 겸하곤 했다. 지금 센터에 안나 크로프트의 능력으로 손상된 기억을 복구할 수 있는 에스퍼가 없어, 그의 필요성은 날이 갈수록 증대되기만 했다.

 

 


 

김독자는 공간을 왜곡시키는 유중혁이나, 무기를 소환하는 정희원처럼 전투계열의 능력을 가진 게 아니라서 대부분의 시간을 센터 내에서 보냈다. 게다가 관계자 외 출입금지구역도 상관치 않고 멋대로 들락날락거리는 탓에, 상부는 아예 김독자를 정보관리 쪽으로 배정시켰다. 애초에 보조계인 김독자의 능력은 대(對) 정신계가 필요할 때 빼고는 거의 호출 받지 않았다. 그래서 김독자는 정보관리센터 겸 카운슬링 담당이 되었다.

정보관리센터 담당에는 뛰어난 기억력을 자랑하는 에스퍼가 있었다. 그의 경이로운 기억력에 의존해 센터의 정보들이 저장되고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정보관리센터 담당이 된 김독자는 바쁘게 일하는 그에게 괜찮다면 능력을 사용해 업무에 대한 지식을 읽어내는 것에 대해 제안했다. 말은 안 해도 사람 수와 비교하면 턱없이 많은 작업량과 부족한 시간에 쫓기던 곳이라, 담당 에스퍼는 본인이 따로 시간을 내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 흔쾌히 승낙했다.

김독자는 빠르게 일에 적응했다. 필요한 정보를 저장하고 관리하며 적재적소에 사용했다. 처음에는 버벅거리던 일도, 익숙해지자 속도가 붙었다.

 

 


 

 

 

멸망해 가는 세계 속에서 가장 먼저 잃어버린 시간은 계절감이었다. 황폐해진 세계에 눈이 내리는 날은 단 하루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날 밤은 유난히 반짝이는 별들이 많아, 문득 보면 눈이 내리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젖혀진 커튼을 붙잡고 밖을 바라보던 유중혁은 갑작스러운 초인종 소리에 몸을 돌렸다. 인터폰 화면에는 김독자가 서 있었다. 정보센터 담당으로 배정받은 후로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오늘 날이 좋더라, 산책 가자. 유중혁은 김독자를 귀찮아했다. 장난인 걸 알지만, 은근 사람 속 긁는 스타일이라 무시로 일관하곤 했다. 유중혁이 무시로 일관하면 할수록 김독자는 더더욱 달라붙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냐는 유중혁에게 김독자는 실실 웃었다. 난 우리 중혁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언제부터 ’우리‘라는 말로 엮일만한 관계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유중혁도 왠지 모르게 그날 이후로 묘하게 태도가 부드러워졌다. 김독자도 그걸 느낀 것인지, 슬슬 웃었다.

 

 


 

 

 

「에스퍼 김독자님 신원 확인되었습니다.」

기계의 덤덤한 목소리와 함께 육중한 철문이 열렸다. 센터 내의 유리온실이었다. 유리온실에서 보이는 별들은 아까보다 더욱더 반짝여 보이는 착각이 들었다. 유리온실의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김독자는 말문을 열었다.

“나 없는 동안, 별일 없었어?”

“별일은 없었다. 평소와 다를 거 없었지.”

단호한 유중혁의 대답에 김독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솔직히 내가 없어서 심심했지?

“없어서 조용하니 좋았다.”

“진짜냐….”

힘 빠진다는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김독자는 중얼중얼 투덜거렸다.

“나는 너 없어서 너무 무료했는데… 우리 중혁이는 나 없어도 괜찮나 봐.”

김독자의 투덜거림에 유중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유중혁의 한숨 소리를 들은 김독자는 오히려 씩 웃으며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산책로를 걸어갔다.

“장난이야.”

앞서가는 김독자의 뒤를 보폭이 큰 걸음이 따라붙었다.

“김독자.”

“응?”

“잘 지냈나?”

“…그거 너무 늦은 인사 아니야?”

뭐, 너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김독자는 씩 웃으며 팔을 쭉 펴, 기지개했다. 잘 지냈지. 잘 지낸 만큼 힘들기도 했고.

둘은 산책로를 돌면서 여러 이야기를 했다. 부서를 옮긴 이야기나 괴수를 처치하러 간 이야기, 김독자를 좋아해서 늘 찾아오던 신유승이나 이길영에 관한 이야기, 다른 에스퍼들에 관한 이야기 등 둘의 대화는 정말 오랜만에 만난 친구끼리의 대화 같았다.

 

 


 

 

산책로를 돌고 그들은 유중혁의 기숙사 앞까지 같이 갔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나중에 보자며 작별인사를 했다. 원래대로면 같은 조인 그들은 바로 옆방이었지만, 김독자가 정보관리 담당이 되면서 숙소를 옮기게 되어, 거리가 멀어졌다. 자리를 뜨려는 듯, 몸을 돌리려던 김독자는 기숙사 문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유중혁을 불렀다.

“중혁아.”

갑작스러운 부름에 비밀번호 패드에 손을 떼고 몸을 돌린 유중혁에게 김독자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슬쩍 붙잡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이내 둘의 입술이 살짝 맞닿았다. 영문 모를 스킨십에 굳어버린 유중혁과는 달리 개의치 않은 태도로 김독자는 말했다.

“내 세상을 너에게 줄게.”

그러니까, 기다려줘.

말을 마친 김독자가 손을 떼어내고 자리를 뜨자, 유중혁은 잠시 넋이 나간 듯, 그의 뒷모습만을 바라보았다. 유중혁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었다. 이미 김독자는 저만치 멀리 가버려 형체조차 남지 않았다.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을 만큼 먼 거리였다.

 

 


 

 

 

다음 날, 센터는 비상사태였다. 김독자가 사직서를 남겼다고 했다. 사실 사직서 자체가 문제가 된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김독자가 센터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김독자는 별것 아닌 정보부터, 누군가에게도 발설해선 안 될 수준의 정보까지 담당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사실 김독자가 곧 센터의 데이터베이스라고 불러도 될 수준이었다.

정보담당 에스퍼는 바쁘게 CCTV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김독자를 만났던 유중혁에게 상황을 캐물었다. 하지만 유중혁은 대부분을 묵묵부답의 태도였다. 사실상 했던 대화도 별것 아니었고, 할 말도 없었다. 그저 김독자가 자신을 찾아왔고, 안부 인사와 일에 관한 대화뿐이었다고 진술했다. 소득을 얻지 못한 그들은 그대로 김독자가 배정받은 기숙사로 향했다. 물론 그곳에도 김독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남아있던 것은 센터 내의 연락을 위한 단말기와 탁자 위와 바닥에 흩어져 있는 종이 뭉치들이었다. 종이에 적힌 내용은 센터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었다. 에스퍼 개개인의 능력이나 센터의 전반적인 시설 등의 정보관리를 담당하던 그가 입수하기에 어려운 정보들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러한 정보들은 센터 내 데이터베이스에만 존재할 내용이지, 이렇게 문서로 남겨질 내용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사건이 터졌다.

갑자기 센터 내에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에스퍼들의 단말기가 일제히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에는 급박한 상황을 알리고 있었다.

「센터로 괴수 진입. 당장 모든 에스퍼들은 E 구역으로 향하길 바람.」

갑작스럽게 울리는 알림에 다들 어리둥절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유중혁의 단말기로는 또 다른 문자가 도착했다.

발신자 번호 표시 제한, 「C.」 짤막한 문자였다.

유중혁은 어딜 가느냐는 정보 관리 담당 에스퍼의 말을 무시하고 C 구역으로 향하는 통로로 달렸다. 시설 문제로 C 구역은 일시적 폐쇄 상태였다. 유중혁은 직감했다. 그곳이야말로 열쇠가 존재할 것이라고.

유중혁의 ID카드를 인식한 거대한 철문이 열리고 어두운 통로 내로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유중혁의 시야에 가장 먼저 보인 건, 숱하게 보아왔던 백색의 코트자락의 흩날림이었다. 유중혁은 벽으로 뛰었다. 타다닥, 유중혁의 신발과 흙의 마찰로 흙먼지가 생겨났다. 외부로 향하는 문에는 김독자가 유중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문 담당자로 추정되는 에스퍼가 쓰러져 있었다. 아무래도 발신자 번호 표시 제한은 그의 단말기인 듯싶었다.

유중혁과의 거리가 좁혀지자 김독자는 쥐고 있던 단말기를 땅에 떨어뜨리고는 발로 밟아 짓이겼다. 밝게 빛나던 단말기의 화면에 금이 가더니 이내 픽하고 꺼졌다. 김독자….

“왔어?”

“무슨 짓이지?”

무슨 짓이라니, 흡사 내가 뭔가 저지른 거 같잖아. 평소처럼 유들유들하게 웃는 김독자의 모습에 유중혁은 주먹을 꾹 쥐었다. 유중혁의 굳은 표정에 김독자는 미소를 지웠다. 그거 알아, 중혁아?

“센터는 말이지, 겉으로는 세상을 위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가장 이기적인 집단이야.”

“….”

“에스퍼를 관리? 에스퍼는 그저 센터의 도구일 뿐이야. 사용하고, 쓸모가 다 되면 버려지는 그런 도구.”

여전히 묵묵부답인 유중혁의 태도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김독자는 말을 이었다.

“결국, 그들은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을 거야.”

“과한 추측이다.”

단언하는 유중혁의 태도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김독자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웃었다.

“만약, 그렇다 해도 막으면 될 일이다.”

“불가능해.”

세상은 멸망하기 직전이고, 그럴수록 센터의 영향력은 점점 더 커지지. 그걸 막기란 쉽지 않아. 그리고 그걸 막을 만한 사람도 없을 거고. 김독자는 씁쓸하게 자조했다.

“단언하는군.”

“사실이니까.”

“그 때문에 떠나려는 건가?”

보란 듯이 남겨놓은 네 방의 단말기와 서류들. 그런 중요한 서류들을 내팽개치다니 근신 받을만한 행위다. 김독자는 설핏 웃었다. 중혁아, 있지.

“나는 세상을 바꿀 거야. 그리고….”

내 세계를 너에게 줄 거야.

김독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중혁의 시야가 흔들렸다. 머릿속이 흔들리고 꼬이는 느낌에 유중혁은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유중혁은 머리를 붙잡으며 흔들리는 김독자의 형체를 주시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바람에 살랑살랑 흩날리는 금발의 여성이 서 있었다. 저 금발… 분명…. 빌런의….

 

 


 

 

 

유중혁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김독자는 센터 소속 에스퍼 명단에서 지워져 있었다. 대신, 위험인물로 특정하는 센터 번호에 그의 이름이 기록되었다. 그의 번호는 91이었다.

 

 

 

 

3

 

 

 

 

“전황은?”

유중혁의 물음에 자리를 비켜주었던 유상아와 정희원이 유중혁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다지 좋지만은 않아요.

“우선, 제가 소환할 수 있는 무기의 수보다 괴수의 수가 더 많아서 좀 골치가 아프네요.”

정희원의 한탄에 유상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센터 내 에스퍼들이 벽 바깥의 괴수를 처리하는 날이에요. 그래서 남은 에스퍼가 비번이었던 저랑 희원 씨뿐이었어요.

“아시다시피, 저는 보조계라….”

희원 씨를 엄호하고 있었어요. 쓰게 웃는 유상아의 모습에 유중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중혁 씨가 왔으니 이제는 좀 낫겠네요.

외부에 밝혀지지 않은 유중혁의 두 번째 능력은 복사였다. 짧은 시간 동안 상대의 능력을 복사해 그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시간적 한계는 존재했지만, 위력이나 능력의 운용 등의 문제가 전무한 유일무이한 능력이었다. 김독자는 종종 그의 능력에 질린 표정을 짓곤 했다. 왜 그런 표정이냐고 물으면 답은 항상 같았다. …사기캐.

 

그만큼이나 사기적인 능력인 만큼, 능력을 사용하려면 상대의 동의가 필요했다. 유중혁에 의해 능력을 복사당했던 이들은 능력을 빼앗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유상아. 엄호해라.”

“1분 정도였나요?”

능력을 사용하려는 듯, 유상아의 손가락 끝에서는 은빛으로 빛나는 실들이 뻗어져 나왔다. 유중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움직임만 봉쇄해도 충분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정희원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거 느낌 되게 이상한데… 어쩔 수 없네요. 상황이 상황이니.”

유중혁은 정희원의 동의하에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들의 행태를 묵묵히 지켜보던 김독자는 말했다.

“가볼까?”

김독자의 질문에 한수영은 괴수의 머리 위에서 앉은 채로 턱을 괴었다. 표정에는 권태로운 미소가 가득했다. 안나 크로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던 유상아는 빠르게 실을 조종했다. 길게 뻗어 나간 실들은 괴수들의 다리 한쪽씩 묶어 그들의 움직임을 최대한 막았다. 다리 한쪽들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자, 괴수들이 포효했다.

한수영과 유상아의 대치를 바라보고 있던 안나 크로프트와 김독자가 움직였다. 둘은 빠른 속도로 연결되어있던 실들을 끊어냈다. 유상아의 실은 사실상 움직임의 봉쇄나 구속에 특화되어 있어서 고무줄처럼 늘어나기에 당겨서는 절대 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외부의 충격에는 약해서 검으로도 충분히 끊을 수 있었다.

에스퍼들의 약점은 극비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정보센터에서 일했던 김독자이기에, 센터 에스퍼들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유중혁은 가만히 김독자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검격이 유려한 것도, 그렇다고 움직임이 특출 난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눈을 뗄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없는 무표정으로 꾹 다물린 입술과 움직임에 따라 펄럭거리는 흰색 코트 자락이 눈에 선했다. 유상아가 새로이 실을 움직임과 동시에 유중혁은 정희원의 어깨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둘은 동시에 여러 개의 검을 소환했다.

정희원은 무한하게 검을 소환할 수 있었기에, 대부분을 일회용으로 소모했다. 물론, 능력을 받은 유중혁도 가능했다. 하지만 유중혁은 그 능력 외에도 왜곡된 공간도 같이 운용해야 했기에, 최소한으로 검을 소환해 괴수들의 움직임을 봉쇄하기 시작했다.

 

 


 

 

 

버겁다. 오늘은 정말 센터를 무너뜨리려고 작정한 것인지, 김독자와 안나 크로프트는 아예 소환된 괴수들을 폭주시켰다. 폭주한 괴수들은 분별없이 보이는 모든 걸 부수고 파괴했다.

12마리였던 괴수들이 10마리로, 6마리로 점점 줄어들었다. 말할 것도 없이 유중혁의 공간 왜곡의 덕이 컸다. 유중혁은 왜곡된 공간으로 괴수들을 그야말로 밀어 넣었다. 검으로 절단시킨 다리들을 유상아가 왜곡된 공간 안으로 집어넣는 식이었다. 정희원과 유상아는 말할 것도 없고 능력을 두 개나 운용하는 유중혁은 빠르게 지쳐갔다. 평소에는 이렇게까지 오랜 시간 전투를 지속할 일은 굉장히 드물었다. 오늘은 정기적으로 바깥 정리를 하는 날이라, 센터를 지킬 에스퍼가 너무나도 적은 숫자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12마리 정도였던 괴수가 짧은 시간에 3마리로 줄어들었다.

3마리로 줄어든 만큼 조종이 정교해졌는지, 상대하기 벅찼다. 지쳐가는 유중혁의 상태를 나타내듯, 왜곡된 공간이 흔들렸다. 유중혁은 잠깐 공간을 닫았다. 그때를 틈타 한수영은 괴수의 다리를 움직였다. 괴수의 다리는 곧바로 유중혁을 향했다. 유상아와 정희원은 각자 한 마리씩 담당하느라 유중혁에게 신경 쓸 수 없었다. 유중혁은 급하게 자기 앞으로 공간을 왜곡시켰고 단발의 차로 공간으로 괴수의 다리가 빨려 들어갔다. 유중혁은 곧장 검을 소환해 다리를 잘라냈다. 잘라냄과 동시에 괴수가 뒤로 빠져나갔다.

유중혁은 저도 모르게 답답함에 한숨을 뱉었다. 능력의 과다 사용 탓인지 머리가 지끈거린 유중혁은 관자놀이 부분을 꾹 눌렀다. 흐트러진 유중혁의 상태 때문인지, 갑자기 왜곡된 공간이 유중혁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크기를 키워갔다. 그리고 유중혁은 제어할 틈도 없이 공간에 삼켜졌다.

그리고 유중혁이 마지막으로 본 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가까워진 김독자의 모습이었다.

 

 


 

 

 

유중혁은 본인의 능력이지만, 본인이 만들어낸 왜곡된 공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원치 않게 들어온 공간은 모래바람이 휘날리고, 폐허가 된, 생명체가 살아남을 수 없을 만한 세상이었다. 현실 세계와 비슷하지만, 무엇인가가 달랐다. 왜곡된 공간이 이런 곳으로 이어지는 건가? 유중혁은 알 수 없었다. 사막인가 싶을 정도로 모래 먼지가 자욱하고 흔한 건물 하나 보이지 않는 곳을 정처 없이 방황했다. 모래사막의 바람은 시야를 흐리게 했고, 판단력도 흐리게 했다. 체감상 긴 시간을 유중혁은 걷고 걸었다. 그리고 흐릿하게 사람으로 추정되는 형태를 발견했다. 그쪽으로 가까이 갈수록 유중혁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시선을 사로잡는 백색의 코트, 평소답지 않게 메마른 목소리, 거친 바람에 살랑살랑 흩날리는 가는 흑발, 김독자였다.

분명, 뛰어드는 김독자를 봤는데, 보이지 않아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김독자는 멍하니 서서 허공을 바라보면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김독자.”

유중혁의 부름에도 김독자는 미동조차 없었다. 거센 바람 탓에 소리가 묻힌 건가. 유중혁은 김독자에게 다가갔다.

“김독자.”

다시 한번, 불렀다. 그러나 여전히 김독자에게서는 반응이 없다. 유중혁이 김독자의 어깨를 부여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뭐지?”

유중혁의 손이 어깨를 통과했다. 유중혁은 놀라운 광경에 말을 잇지 못한 체,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김독자는 유중혁을 무시한 게 아니었다. 애초에 김독자가 유중혁을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김독자는 굳은 표정으로 계속해서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당신이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김독자의 시선은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었다. 놀랍게도 허공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원하는 거라….

묘하게 웃음 섞인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김독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폭소가 흘러나왔다.

“나는 센터의 멸망을 바란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뒤에서 대화를 들으며 김독자를 찬찬히 살폈다. 자세히 보니 본인이 아는 김독자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끄트머리가 찢어진 채 휘날리는 코트 자락이나, 흰색 코트와는 대비되는 검붉은 색의 얼룩이 가슴 부분에 묻어있다던가, 마른 몸과 메마른 목소리까지.

그들의 대화는 잠시 이어지지 않았다. 짧은 침묵을 깬 건, 목소리였다.

“너는 내 바람을 이룰 수 있나?”

허공에서의 질문에 김독자는 눈을 깜박이며 치켜든 고개를 더더욱 들어 올렸다. 내리쬐는 햇볕이 따갑다. 유중혁의 눈에 비친 김독자는 햇빛 아래 사라질 것만 같았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당신이 시간을 돌려준다는 가정하에서지만요. 김독자는 평소처럼 웃으며 말했다. 김독자의 대답에 목소리는 크게 웃었다. 둘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유중혁은 목소리의 정체에 궁금증을 가졌다. 들리는 목소리로는 성별과 나이를 추정할 수가 없었다. 목소리는 굉장히 모호한 음색이었다. 듣는 사람에 따라 여성으로도, 남성으로도, 청년으로도, 아이로도 들릴 만한 목소리였다.

“우선은, 센터로 가야겠지.”

그래야 내가 힘을 쓰지 않겠나.

목소리의 암묵적인 허락에 김독자는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고맙습니다. ‘은밀한 모략가’.”

김독자의 감사 인사에 ‘은밀한 모략가’라 불린 목소리가 비릿하게 웃었다. 김독자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황폐해진 세상을 걸어갔다. 유중혁은 그의 뒤를 좇았다. 센터로 향하던 그들은 여러 대화를 나누었다. 대부분은 ‘은밀한 모략가’라는 허공의 목소리가 주도했다. 시간을 되돌리는 자신의 능력을 사용할 시, 나타나는 현상들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그 외에도 그들이 맺은 ‘이계의 언약’을 이행하지 않으면 죽게 된다는 등의 이야기였다. 그렇게 ‘이계의 언약’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도중, ‘은밀한 모략가’가 물었다.

“너는 왜 시간을 돌리고 싶어 하지?”

“저도 당신과 동일한 바람입니다. 센터가 멸망했으면 합니다.”

“이유가 뭐지?”

“저는, 센터에게서 제 연인을 잃었습니다.”

김독자의 말에 유중혁은 발걸음을 멈추었다가 이내 다시 천천히 걸어 김독자와의 거리를 유지했다. 김독자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제 연인은 저와 같은 센터의 에스퍼였습니다.”

 

그는 가장 강한 에스퍼였고, 파트너였고, 동료였고. 연인이였죠. 떠올리려는 듯, 허공을 응시하던 김독자는 씁쓸하게 말했다. 죽음이라는 단어랑 가장 먼 사람이라고 생각했죠.

“그는 센터의 주축이라면 주축이었어요. 유일하게 2개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김독자의 말에 유중혁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유중혁의 걸음이 멈춤과 동시에 김독자는 웃었다.

“내 연인은, 유중혁 입니다.”

 

 

 

 

 

유중혁은 놀라움에 숨을 멈추었다. 김독자에게 연인이 있었다는 말부터 충격이었지만, 그 대상이 본인이라는 사실에 당혹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유중혁은 이 세계선이 어떻게 되어 먹은 것인지 더더욱 알 수 없게 되었다. 곧 일어날 미래인가? 그나마 유중혁이 할 수 있을 법한 합당한 추측이었다.

“유중혁?”

“알고 계십니까?”

“센터 내에 있을 때, 종종 들었던 이름이군.”

흠…. ‘은밀한 모략가’라 불린 목소리가 고심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김독자는 걸음을 늦추더니 이내 멈추고 시선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 ‘은밀한 모략가’?”

“센터의 인형 같았지.”

“설마… 유중혁,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은밀한 모략가’의 말에, 김독자의 표정은 얼빠진 듯했다. 물론,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유중혁도 그와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는 건지, 보이지 않는 건지, ‘은밀한 모략가’의 목소리는 계속되었다.

“센터의 인간들은 그를 도구로써 이용했다.”

“…맞습니다만, 어떻게 아셨습니까?”

“정확하겐 아니어도 어렴풋이 센터에 관한 기억이 조금 있을 뿐이다.”

센터의 개. 라고나 할까. 내 감상은 그러했다. ‘은밀한 모략가’는 비웃음을 숨기지 않은 채 내뱉었다. ‘은밀한 모략가’의 말에, 김독자는 표정을 굳히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도구가, 그 개가, 자기들을 위협할까 봐, 결국 버렸죠.”

“흠….”

“상부는 유중혁의 능력과 위상을 두려워했어요. 그의 그러한 부분을 이용하고 있음에도 불과하고요. 두 개의 능력을 가진 것만으로도 경이로운데, 세상은 그를 계속해서 추앙했거든요.”

그날은 뭔가 이상했어요. 2인 1조가 원칙인 센터답지 않게, 저는 불리지 않았거든요. 김독자는 눈을 감고, 뻣뻣한 뒷목을 꾹꾹 주물렀다.

“…죽었나?”

“…네.”

김독자의 말에 유중혁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대상은 분명 유중혁 자신일 것이다. ‘은밀한 모략가’는 혀를 쯧쯧 찼다.

“그렇다면, 너의 목적은 복수인가.”

‘은밀한 모략가’의 질문에 김독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걸음을 멈추진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김독자의 태도에 ‘은밀한 모략가’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목적지까지 쉬지 않고 걸었고, 이내, 무언가의 형체가 보였다. 허공에서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도착했군.”

 

 


 

 

 

도착했다는 말이 아니면, 유중혁은 절대 이곳이 센터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으리라 확신했다. 빌런에 의해 센터가 파괴당하면 이런 느낌일까, 싶을 정도로 건물의 뼈대 정도밖에 남지 않은 황폐한 곳이었다. 센터의 상징 아닌 상징이던 높다란 벽은 형체조차 남지 않아, 애초에 벽이 있긴 했는지 의심될 정도였다. 김독자는 센터로 들어가지 않고, 센터 바깥에서 걸음을 멈췄다.

“혹시 모르니 안전하게 벽 바깥에 있는 편이 좋겠죠?”

“그렇군.”

유중혁은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홀가분해 보였다. 무언가의 짐을 덜어낸 듯했다. 유중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과 동시에 유중혁은 또 다른 인기척을 느끼고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센터 내에서부터 걸어 나오는 백색의 코트는 너무나도 익숙했다.

자신을 인지하지 못하는, 알 수 없는 세계선의 김독자와 같지만 다른 존재, 폐허가 된 세상 속, 유일한 구원자인 양 빛이 난다. 무채색에 사로잡힌 유중혁의 사고가 멈추었다. 서로의 거리가 좁혀들고, 유중혁의 시야에는 두 명의 김독자가 존재했다. 김독자의 입술이 쓰게 호선을 그렸다.

“유중혁.”

“…김독자.”

둘의 시선이 얽혔다. 더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황량한 바람 소리만이 서로의 귓가에 들렸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서서히 죽어갔다. 시곗바늘이 반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은밀한 모략가’가 말한, 회귀의 징조였다. 세계가 흡사 거울이 깨지듯 부수어진다. 김독자는 망연히 멸망해가는 세계를 바라보았다.

세계의 깨어짐, 사라져가는 시간 속에서, 유중혁과 김독자는 시선을 마주했다. 유중혁이 알고 있는 김독자와, 회귀를 강행하는 김독자의 입술이 동시에 움직였다. 그리고 유중혁은 기억해냈다. 이 세계선이 어디인지, 자신이 잊어버린 것들이 무엇인지.

“기다려줘.”

 

 

 

 

4

 

 

 

 

세계가 깨짐과 동시에 세계는 어두운 공간이 되었고, 그곳에는 유중혁과 김독자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둘은 여전히 서로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격리당한 듯한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방금까지 지겹게 들렸던 흔한 바람 소리도, 허공의 목소리도, 모래를 걷는 발소리도, 다 꿈인 마냥 더는 귓가에 들려오지 않았다. 유중혁은 먼저 침묵을 깼다.

“방금은….”

“이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 이미 사라져버린 과거.”

김독자는 빠르게 말을 잘라냈다. 더는 알 필요 없다는 듯한 그의 태도에 유중혁은 아미를 찌푸렸다. 유중혁의 불만 어린 표정에도 불구하고 김독자는 여전히 굳은 표정이었다.

“나만이 기억하는 과거야.”

“…시간을 돌린 건, 복수를 위해서였나?”

“글쎄….”

말을 아끼는 듯한 김독자의 애매한 태도에 유중혁은 팔짱을 끼었다.

“원래대로면 너는 내가 죽기 전까지 나와 함께하지 않았나.”

“…뭐?”

“너는 정보센터 담당 에스퍼가 되었지.”

“무슨….”

“그 때문에 과거와는 다르게 2인 1조로 다니지 못했지.”

유중혁의 말에 김독자의 굳은 표정이 점차 허물어지고 이내 경악한 표정이었다. 덜덜 떨리는 두 팔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유중혁은 그런 김독자의 태도에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너는 일부러 나와 거리를 두었다.”

유중혁의 질문에 김독자는 입을 다물었다. 시선도 피한 채였다.

“너는 이번 생에서 나를 배제했다.”

“너 설마….”

“이 공간이 대체 무슨 연유로 사라진 과거를 보여줬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억났다. 사라졌던 과거의 일, 전부. 유중혁의 단언에 김독자는 희게 질렸던 얼굴이 더욱더 새하얗게 질렸다. 놀람과 경악의 역치를 넘어섰는지, 김독자는 말문이 막혔다.

 

 


 

 

 

유중혁과 김독자가 사귀게 된 계기는 매우 단순했다. 그냥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내다 보니, 익숙해져서. 흔한 고백도 없었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서로가 특별해져서. 딱 맞는 말을 찾자면,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더니….”

그렇지 않나? 유중혁의 물음에 김독자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정말로 다 기억났나 보네.”

“그래.”

유중혁의 대답에 김독자는 웃었다. 후련한 듯, 행복한 듯, 근심·걱정 없는 환한 미소였다. 김독자의 풀어진 표정에 유중혁도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연인이라기엔, 흔한 데이트도 안 했지만.”

“그렇군.”

“그나마 했던 게 키스뿐이라는 것도 웃기고.”

“그거라도 어딘가 싶다만.”

“사귀는 사이였는데 섹스 한 번 못해본 건 좀 후회되던데.”

어깨를 으쓱이는 김독자에 유중혁은 웃었다. 원한다면 해주지. 유중혁의 대답에 김독자는 어이없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풀어진 분위기 속에서 유중혁과 김독자는 사라진 과거의 여느 때처럼, 대화를 계속했다. 대화의 주제는 여러 가지였다. 이제는 그들만이 기억하는 과거의 이야기였거나 센터에 관련된 대화였다.

센터에 이용당했던 유중혁은 김독자의 뜻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결국 둘의 목표는 센터의 파괴가 되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유중혁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김독자와 눈을 마주쳤다. 갑자기 맞부딪힌 시선에 김독자는 어리둥절했다.

“너 센터에 들어올 때, 어떻게 그들을 꼬여낸 거지?”

“꼬여냈다니… 뭔가 이상하게 들리잖아….”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만…. 김독자는 슬며시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내 능력으로 읽힌 기억 중에서 불안하거나 힘든 부분에 대해 카운슬링을 했을 뿐이야.”

김독자의 태연한 대답에 유중혁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질문했다.

“김독자. 네가 항상 잠재 에스퍼들에게 말했지. 강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자가 에스퍼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그랬지.”

“그럼, 지난 생의 너의 그 강한 무언가는 무엇이었지?”

“너랑 같았지.”

생존. 김독자의 대답에 유중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 비슷했다. 살고 싶어서, 그 생에 대한 절박함이 우릴 에스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번 생의 너의 무언가는 무엇이지?”

유중혁의 질문에 김독자는 말을 잃었다. 김독자가 대답하지 않자, 유중혁은 다시 질문했다.

“복수였나?”

“…아니.”

“그렇다면?”

유중혁의 되물음에 어깨에 힘을 뺀 김독자가 미소지었다. 입술이 유려한 호선을 그린다. 김독자의 시선은 유중혁의 검은 눈동자를 향했다. 굳은 의지가 담긴 눈동자가 유중혁의 시선을 빼앗았다.

“‘사랑’…이었던가.”

 

 


 

 

 

김독자의 대답에 유중혁은 웃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김독자. 사실 유중혁이 기억을 되찾고 생존 이상으로 강하게 바란 것은 김독자와 마찬가지로 ‘사랑’이었다. 그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을, 유중혁은 잊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검은 공간의 벽 파편이 조금씩 떨어졌다. 둘은 동시에 소리가 난 벽을 바라보았다. 이내 틈이 갈라지고, 환한 빛이 그들을 내리쬐었다.

“김독자”

“응.”

“기억하나?”

유중혁은 시선을 돌려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김독자 또한 빛에서 시선을 떼어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유중혁의 입은 웃고 있었다. 너는 내게 네 세상을 주겠다고 했지.

“네가 말하는, 네 세상은 뭐지?”

“…내가 바라는 세상. 네가 살아 있는 세상.”

김독자의 굳은 의지가 담긴 목소리에, 유중혁은 웃었다. 그리고 점점 커지는 틈새와 빛 앞에 선 유중혁은 김독자에게 손을 뻗었다.

“돌아가자. 김독자.”

네 세상을 내게 줘.

 

 


 

 

 

틈새를 빠져나온 곳은, 그들의 원래 세계선이었다. 먼저 빠져나온 유중혁은 강렬한 햇빛 탓에 저절로 인상을 썼다. 그리고 이내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을 깜빡여 시야를 돌리려 애썼다. 눈앞에는 정희원과 능력으로 소환된 칼들이 보였다.

“괜찮아요? 두 사람?”

정희원의 물음에 유중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고개를 돌려 손을 맞잡고 있는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김독자도 유중혁과 정희원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는 둘의 반응에 정희원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별일없어서.

“…김독자!”

“…한수영?”

저를 부르는 외침에 고개를 돌리자, 씩씩거리는 한수영의 얼굴이 보였다. 김독자는 웃었다. 다녀왔어. 태연한 김독자의 태도에 한수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멍청아!”

“미안해.”

“무사했네요.”

한수영의 곁으로 다가온 안나 크로프트였다. 안나 크로프트의 말에 김독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입니다.”

“응, 미안해.”

“다음부터는 그렇게 뛰어들지 마. 놀랐잖아.”

“미안해. 그런 일 없을 거야.”

 

 


 

 

 

셋의 대화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정희원은 생각난 듯 유중혁에게 말했다.

“유중혁 씨, 새삼스러운데 당신 진짜 강한 에스퍼긴 하네요.”

저 구체, 당신 능력이죠? 베어도 흠집이 안 나서 엄청나게 애먹었어요. 어깨를 툭툭 치며 말하는 정희원의 말에 유중혁은 되물었다.

“…내가 저 구체 안에 있었나?”

“중혁 씨랑 독자 씨가 들어가자마자 검은색의 구체가 만들어졌어요.”

“베어내는 게 낫겠다 싶어서 제 능력으로 베었지만, 거의 흠집이 나지 않았어요.”

“수영 씨가 조종한 괴수들의 공격에도 금조차 가지 않았어요.”

“…한수영이?”

유중혁의 물음에 유상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독자 씨도 같이 삼켜진지라…. 부득이하게 같이 구체를 부수는데 협력했죠.”

“…그렇군.”

“베어내고, 찌르고, 충격을 가하고, 진짜 어지간한 공격에도 금도 안 가더군요. 그런데, 갑자기 살짝 금이 갔기에, 제가 그 부분을 베어냈더니 틈이 생기고, 계속했더니 틈이 벌어진 거였어요.”

중혁 씨가 안에서 뭔가를 한 건가요? 정희원의 질문에 유중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흠… 그런가요? 그럼 그냥 피해가 누적되어서 그랬던 건가.”

정희원과 대화하면서도 유중혁의 시선은 김독자를 떠나지 않았다. 김독자는 여전히 한수영과 안나 크로프트와 대화 중이었다. 그리고 유중혁의 시선을 느낀 김독자는 대화를 멈추고 유중혁에게 다가왔다.

 

“어쩔래, 중혁아?”

“그렇군.”

“협력할래?”

빙긋 웃는 김독자의 얼굴에 유중혁도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나쁘진 않군.”

 

 


 

 

 

“협력이라니 무슨 소리에요?”

갑작스러운 그들의 대화에 어리둥절한 정희원이 물었다. 정희원의 질문에 둘은 정희원을 보다가 다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유중혁의 태도에 김독자는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센터를 파괴하려고 합니다.”

김독자의 차분한 목소리는 그 구역에 있는 에스퍼와 잠재적 에스퍼, 빌런들에게 울려 퍼졌다. 다수의 시선에도 김독자는 차분히 설명했다.

“내가 센터를 배신한 건,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그들이 에스퍼라는 존재를 소모품으로 여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김독자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었다.

“사실 저랑 중혁인, 아까 그 구체에서 미래를 보았습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다들 동시에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유중혁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김독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명을 바라는 눈빛들에 유중혁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자세한 건,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김독자의 말이 틀리진 않는다.”

유중혁의 긍정에 웅성거림이 커졌다.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점차 커지는 웅성거림에 정희원은 조용히 하라며 소리쳤다.

“종국에, 에스퍼는… 센터에 의해 희생당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미래에서 서로의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정적이 흘렀다.

 

 


 

 

 

센터에서 유중혁이라는 에스퍼가 가지는 위상은 대단했다. 김독자의 의견에 동조하는 유중혁의 모습에 잠재적 에스퍼들은 그의 의견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각자 역할을 나누기 시작했다. 먼저, 유상아는 외부로 나가 있는 다른 에스퍼들과 연락을 취하기로 했다. 한수영은 센터를 둘러싸고 있는 벽을 부수기로 했다. 한수영의 능력이면 혼자서도 충분했다. 정희원과 안나 크로프트, 그리고 잠재적 에스퍼들은 센터 구역들의 시설들의 파괴를 맡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중혁과 김독자는 센터 중앙 시스템의 파괴를 맡았다.

“그럼, 다들 잘 부탁드립니다.”

허리 숙여 부탁하는 김독자에, 정희원은 씩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성공하고 다시 만나죠.”

긴장을 풀어주는 정희원 특유의 말투와 행동에 김독자도 웃었다.

“네.”

 

 

 

 

5

 

 

 

 

“그나저나, 김독자. 너는 어쩔 생각이지?”

센터 내부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로 여전히 시끄러웠다.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와는 달리 내부는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김독자는 앞장서 센터 내부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김독자의 뒤를 따르던 유중혁은 불현 듯 물었다. 유중혁의 물음에 김독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뭘?

“어쩔 생각으로 시간을 되돌렸지?”

“너를 살려내려면, 센터를 파멸시켜야 했거든.”

애초에 네가 죽은 건, 다 상층부 탓이었으니까. 말을 마친 김독자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빠지더니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정보센터에 간 건, 의도적이었어. 나는 그 약점들로 에스퍼들을 무력화시키고 센터를 파괴하려고 했어.”

“죽일 생각이었나?”

“에스퍼들은 무력화만 시키려고 했어. 상층부 인간들은… 글쎄….”

김독자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이내 걸음을 재촉했다. 상층부가 움직이기 전에 도착해야 했다.

“거래도 있고….”

“거래? ‘이계의 언약’을 말하는 건가? 센터를 부수는 그것?”

“응, 그것도 있고, 해방도 있어.”

“해방?”

유중혁의 물음에 김독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독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벽을 이리저리 눌러보았다. 달칵, 소리와 함께 벽이 갈라지고 거대한 문이 드러났다.

“그를 속박하고 있는 시험관에서 해방하는 거야.”

“그 ‘은밀한 모략가’는 대체 무엇이지?”

“일종의 신격인 존재야. 너도 알다시피 시간을 되돌리는 그 능력을 이용하기 위해 센터에서 붙잡아둔 상태야. 본인도 본인의 이름을 잊어서 편의상 센터 데이터베이스에 적혀있는 코드명으로 부르고 있어.”

김독자는 문을 열기 위해 끙끙댔다. 이상하게 열리지 않는 문에 김독자는 어리둥절했다. 유중혁은 한숨을 내쉬며 김독자를 문에서 떨어뜨리고 힘껏 문을 밀어 열었다. 문이 열리자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들이 보였다. 어려움 없이 문을 여는 유중혁을 작게 흘겨본 김독자는 이내 앞장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럼 지금 그 시험관이 있는 곳으로 가는 건가?”

“맞아, 이 계단만 내려가면 돼. 극비로 취급되는 정보라 정보센터에서도 대략적으로만 나와 있었어.”

정확한 위치는 시간을 돌리면서 그가 말해준 것과 내가 돌아다니면서 직접 알아본 거로 추정한 거야. 둘은 재빠르게 계단을 내려갔고, 이내 거대한문 앞에 도착했다. 아마도 여기일 거야.

 


 

 

 

나도 여기까진 와본 적이 없어서. 그렇게 말한 김독자는 자연스럽게 비밀번호 패드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의 손에 불투명한 공간의 이지러짐이 보였다. 김독자의 능력, 사이코메트리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집중하는 김독자의 모습에 유중혁은 질문했다.

“만약, 우리가 늦었다면?”

“…상층부 사람들을 말하는 거야?”

“그렇다.”

집중하는 듯 아미를 찌푸린 김독자였지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최악의 상황은, 피하고 싶은데….”

뭐, 정 안되면 우리 중혁이가 어떻게든 해주겠지. 씩 웃는 김독자의 태도에 유중혁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고 동시에 김독자의 손의 이지러짐이 사라졌다. 됐다.

김독자의 말과 동시에 거대한 문이 좌우로 갈라져 열렸다. 나타난 공간의 정 중앙에는 거대한 시험관이 있었고 좌우로는 정보관리센터에 있을 법한 시스템들이 즐비했다.

“아무도 없나.”

“다행이네. 우리가 빨랐나 봐.”

 

둘은 시험관 앞으로 다가갔다. 시험관에는 정체 모를 액체만이 담겨 넘실거리고 있었다. 김독자는 거대한 시험관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은밀한 모략가’?”

묵묵부답이었다. 김독자는 재차 불렀지만, 여전히 대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왜 대답이 없지?”

어리둥절한 김독자의 혼잣말에 답하듯, 시험관 양옆에 즐비해 있던 시스템들이 일제히 켜졌다. 그리고 시스템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실로 추정되는 장소의 불이 켜졌다. 불이 켜지긴 했지만 켜지지 않을 때와 마찬가지로 대체로 어두웠다. 옅은 불빛 탓에 거대한 시험관이 더욱 눈에 띄었다. 둘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서로를 바라보더니 이내 시스템의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방금….”

“나도 들었다.”

“뭐야?”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혼란스러워하는 그들을 비웃듯, 공간 전체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김독자와 유중혁은 사위를 살폈다. 그러나 여전히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웃음소리가 멎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이 센터를 담당하는 자.”

내가 곧 이 센터이고, 이 센터가 곧 나다. 시스템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둘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유중혁이었다.

“너는 누구지?”

“나는 ‘이계의 신격’이다.”

“‘이계의 신격’?”

“너희가 아는 ‘은밀한 모략가’와 비슷한 존재라고 해두지.”

웃음기 어린 시스템의 목소리에 김독자와 유중혁은 확신했다. 이자였다.

“너희가 시간을 되돌렸나?”

‘이계의 신격’의 물음에 김독자와 유중혁은 둘 다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곧 긍정이었다. ‘이계의 신격’은 웃었다. 그래서 잠들었던 거였군.

“당신은…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나는 이 센터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아까 말하지 않았나? 센터가 곧 나이고, 내가 곧 센터다.

 

 


 

 

 

‘이계의 신격’이라 말한 자의 말에 김독자는 침착하게 되물었다.

“시스템 그 자체입니까?”

“뭐,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목소리가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에 호응하듯 시스템의 화면들이 번쩍거림을 반복했다. 그 탓에 스산했던 분위기가 더더욱 괴기하게 느껴졌다.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목소리는 이내 웃었다. 나는 그들을 다 죽였다.

“고귀한 희생이라는 명목으로, 내가 다 죽여 버렸지.”

크지 않은 공간을 쩌렁쩌렁 울리는 괴기한 웃음소리가 소름 끼쳤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의 태도에 유중혁은 불쾌함에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유중혁의 표정 변화를 보던 김독자는 입을 열었다.

“…내가 정보를 빼내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 왜 가만히 놔두었지?”

“그를 깨울 수 있을까 해서.”

그런데 너희와 대면하니 알겠군. 이번 생에는 아예 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거지. 안타까운 듯, 목소리는 쯧쯧 혀를 찼다.

“네가 바라는 건 무엇이지?”

유중혁의 질문에 ‘이계의 신격’은 웃었다. 시스템의 불빛이 반짝거리면서 그의 웃음소리에 동조하는 듯하여 보이자, 유중혁은 더더욱 불쾌해졌다.

“당연히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지.”

“그렇다면 당신도 거래하면 됐을 일인데요.”

“센터에 들일 때부터 그는 이미 말을 하지 못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둘 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을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이계의 신격’은 웃음기 어린 채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능력만 남기기 위해 껍데기를 없앴다. 거기에는 순수한 영혼만이 남아있다.”

 


 

 

 

광기에 찬 ‘이계의 신격’의 목소리에 유중혁은 기가 찼다. 결국 신격의 존재이든, 인간이든, 무언가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과유불급이다. 저 존재는 자신의 집착이 정도가 지나쳤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유중혁. 그 순간, 김독자의 작은 부름에 유중혁은 옆에 선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김독자는 품속에서 날카롭게 벼려진 칼을 꺼내 들어 유중혁에게 건넸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이건 ‘사인참사검’이라고 하는 건데, 연결을 끊어내는 능력이 있어.”

“그런데?”

“저 시험관은 환생을 막는 장치라서, 이 검으로 저 시험관을 파괴하면 그 장치와 영혼의 연결을 끊을 수 있어. 문제는….”

김독자는 말을 하다 말고, 흘끗 시스템의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행동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계의 신격’은 계속해서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저 ‘이계의 신격’인데…. 파괴해봤자 신격의 존재라 죽지도 않겠지….”

김독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센터를 파멸시키고 싶었는데… 이래서야 소용이 없네.”

“너는 어쩌고 싶지?”

네 의견에 따르겠다. 선택을 넘겨받은 김독자는 가만히 생각하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사실 세상을 구한다거나, 세상의 멸망을 저지해야 한다던가 그런 거창한 이유로 시간을 돌린 게 아니야.”

“그렇군.”

“그냥, 내 세상에 네가 있었으면 했어.”

어리광처럼 들리는 김독자의 말에도 유중혁은 웃지 않았다. 오히려 김독자의 말에 더욱 집중했다. 유중혁의 태연한 자세에 힘입어, 김독자는 한층 편안하게 말을 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냥 저대로 썩어버렸으면 좋겠어.”

쓰게 웃는 김독자에 유중혁은 피식 웃었다.

“이기적인가? 그렇지만 어차피 어쩌지 못할 존재라면 저대로 종말을 맞이했으면 좋겠어.”

유중혁은 고개를 저었다. 이기적이지 않다.

“오늘을 기점으로 센터라는 기관은 사라지겠지.”

유중혁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이대로 지하 실험실에서 썩어가는 결말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유중혁.”

“여기는 썩게 두고, 지상의 시스템만 파괴해도 충분하다. 신격의 존재라 해도 어차피 시스템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지 않나?”

유중혁은 건네받은 사인참사검을 꺼내 들었다. 흐릿한 불빛 아래, 검날이 빛났다. 순간, 김독자는 그 빛이 꼭 구체에서 빠져나올 때의 그 빛과 닮았다는 착각이 들었다.

 


 

 

 

사인참사검을 든 유중혁은 먼저 시험관 뒤쪽에 시스템과 연결된 선들을 전부 베어내 끊어냈다. 이상함을 느낀 것인지, 시스템의 불빛이 다시금 번쩍였다.

“…흠? 부수려는 건가?”

시스템의 말에 대꾸하지 않은 채, 유중혁은 연결된 모든 선을 끊었다. 시험관 내부 액체에 기포가 더는 보이지 않았다. 기포가 사라짐과 동시에 수면이 잔잔해졌다. 시험관과 시스템이 끊어졌다.

“어차피 그의 영혼은 그 액체에 녹아있다. 파괴하면 죽을 뿐이지.”

“시끄럽군.”

유중혁은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내 시험관을 내리쳤다. 시험관의 유리에 작게 금이 갔다. 유중혁은 재차 검을 휘둘렀고, 내리쳤다. 거대한 시험관이 충격을 버티지 못하게 큰 소리를 내며 금이 사방팔방 퍼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액체들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유중혁은 검을 바로잡고 액체가 흘러내리는 부분을 찔러 넣었다.

검이 시험관에 박히고, 날카롭게 벼려진 검날 아래로 액체가 천천히 흘러내렸다. 숨 쉬는 법을 잊은 것처럼 김독자는 헐떡이며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시스템의 불빛 탓인지, 흐릿하게나마 유중혁의 눈동자가 금빛으로 보였다. 김독자는 침을 삼켰다. 실험실에는 시스템에서 흘러나오는 자잘한 소음만이 울려 퍼졌다.

유중혁은 검을 꽂아 넣은 채 칼자루에서 손을 떼어냈다. 유중혁은 칼자루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검이 꽂힌 부분을 기준으로 시험관에 거대한 금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수면이 점차 낮아짐과 동시에 사인참사검의 끄트머리부터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사인참사검의 존재가 사라짐과 동시에 의문의 액체도 사라졌고, 시험관은 완전히 부서져 내렸다.

김독자는 재빠르게 시험관의 파편에 능력을 사용했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행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김독자는 웃었다.

“됐어. 이제 그는 자유야.”

후련한 듯 웃는 김독자의 모습에 유중혁은 김독자를 일으켜 세웠다. 김독자는 빙긋 웃으며 유중혁을 끌어안았다. 유중혁도 김독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서로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불청객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말도 안 돼! 그가 자유라고?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단 말이다!”

시스템의 분개한 목소리에 응하듯, 화면들과 계기판이 불규칙적으로 깜빡였다. 그의 분노를 나타내듯, 실험실은 지진이 일어난 마냥, 무차별하게 흔들렸다.

“너희를 저주한다! 너희만 아니었어도… 나는… 나는…!”

‘이계의 신격’의 고함과 저주의 목소리에도 그들은 덤덤했다. 사실 그들은 그의 분노와 사정에는 별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그들이 여기에 온 목적은 단 하나였다. ‘이계의 언약’의 이행.

우연히 알아버린 ‘이계의 신격’의 존재와 그의 사정 따위 알 바였다.

 

 

 

 

Epilogue

 

 

 

‘이계의 신격’의 괴성과 분노에 영향을 받아 실험실은 곧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그의 절망을 뒤로 한 채, 유중혁과 김독자는 실험실을 나섰다.

거대한 철문이 자동으로 닫히고, 다시 한번 끝이 보이지 않는 수백 개의 계단이 보였다. 처음 맞닥뜨렸을 때와는 달리, 그들의 얼굴에는 걱정과 염려가 보이지 않았다.

후련함과 행복감, 성취감과 기대감으로 물든 표정만 보면, 조금 전까지 그들이 거대한 적과 대적한 자들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갈까?”

“그래.”

내려올 때와는 달리, 그들은 서로의 손을 마주 잡고 계단을 올랐다. 둘 사이에는 침묵만이 감돌았지만, 불편한 침묵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로에게 편안함을 안겨주는 평온함 그 자체였다.

대화는 없었지만, 서로의 맞잡은 손을 꼭 붙잡은 채였다. 그들은 계단을 오르고 올라, 첫 번째 관문 격이었던 거대한 문을 넘어섰다. 지상이었다.

김독자는 문을 열기 위한 스위치를 찾기 위해 벽을 더듬었다. 그리고 이내 카멜레온처럼 벽과 동일시되어있던 스위치를 발견하고, 유중혁에게 눈짓했다. 유중혁은 품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일명, ‘흑천마도’라 불리는 검으로, 유사시를 대비해 가지고만 다니던 검이었다. 이미 사라져버린 ‘사인참사검’과 같이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검은 아니었다.

 

유중혁은 검을 빼내었다. 장검도, 단도도 아닌 애매한 길이의 검이라, 가지고 다니기에 부담이 없었다. 유중혁은 단번에 스위치를 꿰뚫었고, 바로 빼내었다. 스위치는 파지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작동을 멈춘 듯했다. 혹시나 해 눌러보아도, 문이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임시방편이지만,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아마 이제 실수로라도 이 벽이 갈라지고 문이 나타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그들이 해야 할 마지막 일이 남아있었다.

 

* * *

 

 

그들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다름 아닌 정보관리센터였다. 한때 센터의 에스퍼였던 김독자가 있었던 곳이었고, 일종의 센터의 중앙 시스템인 곳이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이계의 신격’과 관련된 모든 것을 아예 발견조차 하지 못하도록 시스템을 파괴할 생각이었다.

사실 이 시스템을 파괴해도, ‘이계의 신격’이 죽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그의 본체는 지하의 숨겨진 실험실이었기 때문이다. 이 파괴의 목적은 단순했다. 연결을 끊는 것이다. 시스템과 연동된 ‘이계의 신격’이기에, 그가 죽지 않는 한, 혹시라도 누군가가 이 시스템을 발견해, 현혹당하고 이용당할 가능성을 없애려는 것이었다.

바깥에서 작게나마 부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다들 부탁한 일을 열심히 해주고 있는 듯했다.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대체로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는 장소였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여기만큼은 멸망을 향해 가는 세상 속에서 가장 아늑하고 평화롭다고 느꼈다.

지하에 숨겨진 실험실과는 달리, 지상의 정보관리센터는 밝은 불빛 아래였다. 흐릿한 불빛도, 괴상한 소리도, 사람답지 않은 웃음소리도, 기계음도, 그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두 명의 불청객의 목소리도.

전원이 꺼져있는 중앙 시스템, 불청객, 밝은 불빛, 자그마한 소음.

김독자는 유중혁의 손을 잡은 채, 시스템의 앞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잡은 손을 떼고, 제집인 마냥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치듯, 시스템의 계기판을 이리저리 누르기 시작했다. 전원이 꺼져있는 상태였기에, 아무리 눌러도 화면과 계기판에 불빛이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김독자.”

유중혁의 부름에 김독자는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곁으로 다가와, 흑천마도를 같이 쥐었다.

“응, 중혁아.”

유중혁은 흑천마도를 들어 올렸다. 자연스럽게 같이 쥐고 있던 김독자의 팔도 들렸다. 기억하고 있겠지.

“‘네 세상을 내게 줘.’ ”

유중혁의 말에 김독자는 웃었다. 물론, 기억하고 있어.

흑천마도가 허공을 가르고, 곧바로 시스템에 꽂혔다. 동시에 공간을 조그맣게 울리던 기계의 소음이 툭 끊어지듯, 멎었다. 완전한 종장(終場)이었다.

“‘내 세상을 너에게 줄게.’ ”

 

 


감사합니다.

혹시라도 뭔가 같은 문단이 2개라던가 그런 부분이 보이면 @83x91 계정으로 멘션 한번 넣어주세요... 복붙하고 문단 나누는 것만 바꾸긴 했는데 중간에 오류가 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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